이야기/객석과 무대

[뮤지컬] ‘요덕스토리’는 ‘화려한 휴가’를 배워라

이동권 2022. 9. 26. 02:44

포스터


국립극장으로의 초대는 늘 반갑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은 무엇이든지 ‘대작’이었다. 지갑에서 나가는 돈은 아까웠지만(거의 공짜표였지만) 마음속으로 ‘국립극장은 대단해’를 외치며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감동을 받고 되돌아오곤 했다. 어떻게 보면 무한한 ‘믿음’이었다. ‘국립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은 볼만하다.’

군부대를 돌며 공연됐던 뮤지컬 ‘요덕스토리’가 국립극장 무대에 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국의 수용소보다 이야기 거리가 없는 그곳의 이야기를, 그것도 1995년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가 만든 북한정치범 수용소 이야기라니. 내용은 또 어떠한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지만 감동도, 뮤지컬로서의 재미도 없는 그런 ‘반공’ 이야기는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 식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공연되다니. …….

(요덕스토리를 지키는 국회의원 모임인 ‘요덕지킴이’라는 게 있을 정도로) 요덕스토리가 지닌 저의가 그 무엇이던 간에 가당치도 않은 이 기괴한 스토리가 공연된 다음부터는 국립극장에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국립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5·18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가 뮤지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뮤지컬의 감동은 영화와 전혀 다르다.

지금도 어느 누구에게는 폭도 혹은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아니 40년이나 지나버린 옛 이야기로 치부되지만 요덕스토리와 비교할 수 없이 잔혹하고, 끔찍하며, 눈물 나게 만드는 스토리는 바로 ‘광주항쟁’다.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시민까지 무차별 살상하고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의 학살이 어찌 정치범 수용소의 이야기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역사의 한 귀퉁이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덕스토리는 화려한 휴가를 배워야한다

뮤지컬의 가장 주된 주제는 ‘사랑’과 ‘가족’이다.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아주 흔해 빠진 모듬살이 이야기, 그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가장 빈번한 주제다. 뮤지컬 ‘요덕스토리’와 ‘화려한 휴가’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공포와 굶주림에 떠는 여자와 수용소장의 애절한 사랑, 후자는 도청을 사수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남자와 여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체 스토리라인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이 두 뮤지컬의 사랑은 너무도 다르다. 


요덕스토리의 사랑은 개연성이 없다. 아버지의 간첩혐의로 함께 수용된 딸과 수용소장의 로맨스는 강박적이었다. 살고 싶어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한 주인공이 강간범이라 할 수 있는 수용소장에 연민을 느끼며, (애절함을 끌어내기 위해서인지) 악독한 군인이 주인공의 탈출을 돕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하며 표현되는 사랑은 모든 게 난감 그 자체였다.


반면 화려한 휴가는 동생과 함께 성당에 다니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남자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안타깝게 총에 맞아 죽는 이야기다. 자연스레 눈물을 자아낼 만큼 충분히 공감이 간다.


‘사랑’, 너무 뻔하고 흔한 이야기지만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이거나 이해가 되지 않은 이야기는 감동 이전에 짜증이 난다. 승부는 이 뻔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두 뮤지컬의 사랑은 그래서 너무 달랐고 감동 또한 천지 차이였다.

또  뮤지컬에서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다. 모든 무대예술이 그렇듯 정확한 연기와 아름다운 노래, 화려한 연출력도 필요하지만 스토리 자체가 힘이 없으면 뮤지컬은 망가지고 만다.


엉성한 사랑이야기 때문인지 요덕스토리는 주먹구구식이었다.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데다 공포와 절망을 강조하다보니 폭소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자꾸 ‘그래서’라는 질문이 반복됐고,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스페인 유학파 미친년과 예수쟁이 록커의 등장은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반대로 화려한 휴가는 이야기 전개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관객들은 울어야 할 지점에 울었고, 웃어야할 지점에 웃었으며, 박수를 쳐야할 때 쳤다.

사실성에서도 요덕스토리는 뒤떨어졌다. 요덕스토리의 마지막 부분에 하얀 빛을 뚫고 탱크가 들어서면서 수용수들을 진압하는 장면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책자를 보니 다른 사건을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즉 비극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요소로 탱크를 실제 무대에 등장시킨 것이다. 북한 인권의 실상을 알리고자 했다던 연출자의 ‘순수한’ 저의가 무척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그랬다면 요덕스토리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배워야한다.


화려한 휴가는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주관적으로 보면 무척 미흡했으나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감정을 자제하려는 것이 오히려 슬픔을 복받치게 했고 숙연함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어쩌면 자본주의식 뮤지컬의 전형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객들에게 요덕스토리 같은 표현은 진부할 따름이니까.

두 작품 모두 높게 살만한 부분은 있다. 역동성이다.


‘아리랑’을 연상시키는 요덕스토리의 군무,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보여줬던 화려한 휴가의 강렬한 군무가 바로 그렇다. 아울러 세트의 움직임과 구성도 인상적이었다. 평면적인 공간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깊이를 더했고, 무대에 끊임없이 변화를 주면서 생동감을 이끌어냈다. 요덕스토리는 좀 과하다 싶었고, 화려한 휴가는 좀 부족하다 싶었지만 두 작품 모두 무대미술은 뛰어났다.


하지만 요덕스토리는 정제되지 않은 절규와 반복되는 절박함이 역동성을 받쳐주지 못하고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북한 사투리조차 어색했다. ‘편파’적인 리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표준말과 사투리가 오가면서 내뱉는 북한 사투리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는 강약의 조절이 적절했고, 이야기 전개방식과 구성이 자연스러워 역동성을 돋보이게 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역량도 한몫했다. 어느 누구하나 노래와 연기 모두 부족함이 없었고 튀지 않았다.

화려한 휴가는 요덕스토리에 비하면 어떤 명성도 없다. 오직 광주항쟁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뮤지컬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봤고, 광주항쟁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에 내용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뮤지컬이라면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움’이 없는 것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실력이며, 진실이 가진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