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사람들의 머리카락 끝에서 빛이 부서지는 광경을 목격할 때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다 갑자기 수정처럼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끝자락에 진홍색으로 노을이 타오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겹겹이 밀려와 몸이 들썩인다. 물론 다른 날에도 그런 욕망은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투명한 창문을 통해서 흔들리는 사물을 관찰하는 묘함처럼 유별난 인상을 주는 날은 있기 마련이다.
그날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거리의 해묵은 나뭇가지들이 하나 같이 생각에 잠겨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깊은 그늘 속에서도 빛깔 하나하나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던 날 아침에 르누아르 전시회 초대권이 손에 들어왔다. 내 입에서 감사 인사와 함께 '빛의 연금술사'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 '진정한 빛의 연금술사는 클로드 모네'라는 실소와 함께.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내 인생에서 중요한 관심거리가 그림이었을 때로 돌아가 르누아르에 받았던 감동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것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이다. 연일 사람이 몰리는 명소 같아도 파리만 날리는 날도 있으며, 일정한 바람과 그림자, 일정한 냄새와 습기가 느껴지는 곳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평생 '행복한 순간'을, 내면보다는 인간의 외면적인 즐거움과 행위만을 화폭에 담았다. 많은 사람이 싸우고 죽었던 날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에도 그는 행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섹스를 부르는 풍만한 누드 풍의 그림에서도 질펀한 땀 냄새조차 담아내지 않았고, 기쁨이나 즐거움만을 그려냈다. 그래 그는 말했었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그림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르누아르가 동시대의 화가였다면 정말 묻고 싶다. 당신의 그림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삶의 기쁨과 환희를 주냐고. 아니 어떤 때는 화려하고 깔끔한 빌라보다 헐벗은 담과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이 더욱 미소 짓게 한다는 것을 아느냐고.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즐겁게 보이지 않았고,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었다. 전시장을 찾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평론가들의 찬사에는 귀 기울이고 싶지 않다.
전시장 입구에는 작은 리플릿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쁨과 환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초대장, 그리고 화려한 휘장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들을 외면했다. 많은 관람객들의 얼굴만 눈에 띄었고, 일상을 유영하 듯 전시장을 한 번 쓱 훑어보고 나오는 것으로 만족할 참이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의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르누아르 원화와의 만남은 처음이었고, 프린팅된 이미지와 원화의 감동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시간 걱정은 묻어두고 잠시 전시에 몰두하기로 했다.
전시장은 여덟 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었다. 그중에서 다섯 개의 주제는 인물화였다. 제목을 뽑아보자면 일상의 행복, 가족의 초상, 여성의 이미지, 욕녀와 누드, 르누아르와 그의 화상들이다. 풍경화와 정물화도 하나의 주제로 전시돼 있었고, 종이작품들도 따로 한 곳에 모아뒀다. 그리고 한쪽에는 르누아르를 흠모했던 알베르 앙드레가 본 르누아르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깜짝 놀랐다. 눈동자를 빨아들이는 보드라운 장밋빛 광채, 물속을 노니는 비단잉어의 샛노란 타오름, 빛이 확 번지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짙은 남색 그림자, 이 모든 색채가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면서 혼합돼 있었다. 피사체들은 따스하고 정답게 서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고, 색채의 물결이 일렁이다 일격에 무너지면서 아주 차분한 음조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듯했다.
특히 르누아르의 그림 '그네'를 보고 있으니 대가에게서만 느껴지는 전율이 사무쳤다. 내 취향, 예술가의 삶이나 철학과는 별개로 짜릿한 감동이 가슴을 쳤고, 꽃들이 수 놓인 종이에 한 편의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찾아왔다. 도록에서만 봤던 반가운 그림과 마주한 기쁨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낯익은 그림들. 너무 황홀한 나머지 그림들 앞에서 숨을 죽이고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물화에 이르러서는 다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보드랍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가볍게 말려들어간 꽃잎. 저렇게 탐스럽게 핀 꽃송이가 죽음의 예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르누아르는 알고 그렸을까. 오직 아름다운 꽃봉오리에 탐닉한 그의 붓끝에서는 행복보다는 싸늘한 회색빛의 허무감이 조금씩 감지됐다.
조금은 어둡고 우울한 기분으로 향했던 발걸음을 밝고 가볍게 바꿔주는 그림. 그래서 평론가들은 르누아르를 '행복을 그린 화가'라고 했을까?
사실주의 화풍이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을 때 빛에 따라서 변하는 피사체의 느낌을 전달하는 '인상주의'에 생을 바친 인물. 그림은 즐겁고 유쾌해야 한다는 행복지상주의자. 자신을 지지했던 화상들(뒤랑 뤼엘, 베르넴 젼느, 볼라르와)을 모델로 자주 그렸던 괴짜. 어쩌면 그는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행복해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그림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마음껏 예술을 만끽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가끔씩은 꼼짝도 않고 일과 술에 몰두하곤 했지만 혼자만의 꿈을 꾸는 듯 과거의 습관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욕망이 찾아들곤 했다. 그러나 삶은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서둘러 욕망을 잠재우곤 했다. 이날도 딱 그런 느낌으로 전시장에서 나왔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오직 돈벌이와 명예를 위한 일에만 몰두하며 열정을 바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몰상식. 행복과 환희의 순간에 집착했던 르누아르의 예술철학을 상식 밖의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고가의 작품에만 찬미 일색인 우리 시대의 예술계에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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