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색이 창백해지고 피곤에 휩싸일 때 오지총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잠 못 이루는 밤 똑딱똑딱 하는 시계 소리가 정적을 가를 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따라 한밤의 정적을 센다. 손이 떨려올 때에도, 긴장감이 편두통을 부를 때에도, 괜스레 마음이 위축될 때에도, 역시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초조한 가슴을 누그러뜨린다. 오지총의 노래는 요란하게 긁어대는 세상사를 살살 돌려가며 위로하는 일상의 '친구'다.
오지총의 '구름의 노래' 때문에 20여 일을 혹독하게 앓았다. 세상이 환한 지, 어두운지도 모른 채 앞만 보며 달려왔던 세월을 이 노래가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구름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서정성 때문이었지만 이 노래에 끝까지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노랫말이었다. 독백처럼 들려오는 이 노래는 쌀쌀하고 사나운 삶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고 따사로운 불빛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의연한 자세를 배우게 했다. 그래서 숙연하고 부끄러웠으며, 슬프고 아련한 선율이었지만, 아름다웠다.
오지총의 2집에 실린 '구름의 노래'는 가수 안치환에게 준 노래인데, '네가 부르는 게 낫겠다'라는 선배 말을 듣고 앨범에 넣게 됐다. 2.5집에 실린 노래 '화접몽'도 안치환이 공연 때 부르려고 연습까지 들어간 곡이었지만, 그는 "안치환 선배 형수님이 지총이 목소리가 더 잘 어울린다"는 한마디에 결국 자신이 부르게 됐다.
화접몽은 시골에서 만든 노래이다. 이 곡은 룸바, 차차차 리듬으로 편안한 느낌이지만 왠지 모르게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 노래는 그 당시 그가 알고 지냈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만든 곡이다. 그는 "화접몽은 트로트 박자와 비슷하지만, 그런 느낌이 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나는 '구름의 노래'에 이어 '이공(異空)'이라는 노래에 푹 빠졌다. 이 노래는 하늘에 거대한 먹구름이 가득 낀 것처럼 몽환적이며, 리듬감이 매우 충실한 곡이다.
화접몽 한의원. 진료를 마치고 나온 오지총 가수가 놀란 눈으로 빙그레 웃는다. 몸 전체에 피로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지만, 사람 좋아하고, 예의 바른 성격이 어디 갈 리 없다. 여지없이 "먼 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먼저 악수를 청한다. 이런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만나도 즐겁고 편안하다.
오지총은 한의사다.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한의원을 개원했다. 은행 대출이 없었다면 앨범도 내지 못했다. 그는 "작업실, 병원, 음반 등 모든 게 은행 꺼"라며 웃어버린다. 그는 빚이 무려 4억 4천만 원에 이른다.
"한의사라는 타이틀을 자연스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들어보기도 전에 한의사라는 선입견부터 갖는 분들이 많거든요. 제가 '가수'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래도 당신은 한의사잖아요'라고 말해요. 한의사가 거리에서 노래를 한다고 색안경을 쓰는 분들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고맙다'라는 얘기까지 듣습니다. 어떤 분들은 배 나온 한의사가 트로트 음반이나 낸 줄 알아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한의사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노래부터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직접 들어보면 아주 따뜻한 노래들이거든요. 사람들도 노래를 들어보고 다들 놀랩니다."
가수로 활동하는 동안 뜻하지 않는 복명이 나타나 얼떨떨했다는 눈치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고, 마음이 닿는 데로 노래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의사라는 수식어가 가수 활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격이다. 하지만 오지총은 그런 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늦어도 연말에는 콘서트를 한 번 하고 싶어요. 계획처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평생토록 창작에 게으르지 않고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오지총은 아무리 봐도 한의원 원장 이전에 천상 '가수' 맞다. 그는 왜 가수가 됐을까. 부모님의 영향도 있을 듯싶고, 남들과 달리 음악이 자신에게 있어 매우 큰 '하나의 상'일 수도 있다.
가수 오지총은 초등학교 시절 '콘트라베이스'를 배웠지만 관현악에 흥미가 없었던 그는 부모님께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핑계를 둘러대고 악몽과도 같은 연습을 그만뒀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 락밴드를 결성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음악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원인은 공부였다.
드디어 그는 한의과 대학에 입학하면서 일종의 '해방'을 경험했다. 부모님께서도 별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아 음악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그는 메탈리카, 스키드 로우, 건스 앤 로지스, 본 조비 같은 유명한 헤비메탈 그룹의 노래를 연주했다. 하지만 그는 "괜히 락커라고 하면 근거 없이 반항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괜히 폼 잡는 게 싫었다는 얘기겠다. 그래서 그는 밴드 생활을 그만두고 민중노래패를 만들었다. 한의대 재학 시절 한약분쟁을 겪고 1년 유급하면서다.
본과 4학년 여름, 그는 다시 한번 어머니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국가고시를 준비할 시기에 앨범을 냈던 까닭이다. 그는 "국가고시를 앞두고 여름에 대학로에서 한 달 동안 공연을 했다"면서 "어머니를 피해 늦게 집에 들어가고 일찍 집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할 일을 미뤄놓으면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상 국가고시를 포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1집 공연을 마친 뒤 공부에 전념해 한의사가 됐다. 이러한 성격은 환자를 돌보는 한의사로서도 두드러진다. 그는 음악에 열중하면서도 환자들에게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한의사가 된 뒤 그는 끝이 없는 바람처럼 음악 인생은 다시 시작됐다. "음악은 나의 감정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제 음악은 숙명처럼 인생의 길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됐다. 그렇다면 그의 부모님은 어떠하실까.
"지금 어머니는 제가 음악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힘들 때 격려도 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버지를 보면서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저도 죽을 때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에요. 아버지는 단칸 셋방에 살 때 어머니가 모아 놓은 돈을 가지고 이틀 동안 잠적한 뒤 전축을 사들고 나타나셨습니다. 음악을 사랑했지요. 노래도 아주 잘 불렀고요."
머뭇거리며 띄엄띄엄 얘기를 이어가는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뼈를 깎는 사랑이 느껴진다. 그가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일상의 하나이다. 시도 때도 없이 악상이 떠오르면 작곡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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