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김정선 화가 - 체게바라가 패션이미지로 변신해 팔린다

이동권 2022. 9. 21. 01:40

김정선 화가


치열한 경쟁에 사로잡힌 이 세상은 너무도 외롭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던 장면들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들도 모두 자본의 액세서리로 둔갑해 팔려 나간다. 김정선 화가는 말한다. 너무 가볍고, 무감각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사회는 좀처럼 제 방향으로 돌아가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깊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화려한 레이스 문양에 갖가지 이미지들이 숨은 그림처럼 가득하다. 어찌 보면 매우 이질적이고 생경한 느낌을 준다. 신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다가도, 차가운 긴장감이 무섭게 짓누른다. 가끔은 알 수 없는 탄식도 여러 번 내뱉게 한다.

그의 작품에는 베트남전쟁, 광주항쟁, 이라크 전쟁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실루엣이 숨어 있다. 군인이 곤봉으로 사람의 머리를 치고, 한 시민은 길거리에서 즉결처분을 당한다. 미군은 이라크 포로들을 고문하고, 폭격에 놀란 한 소녀는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왔다.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발가벗긴 장면들이다. 이 끔찍한 이미지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격분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장면이 갖는 무게감과 진실성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한 여인의 티셔츠를 채우는 무늬로 둔갑한다.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장면들이 상업적인 이미지로 재편집된다. 정말 현대인들은 너무 쉽고 무감각하다.

"자신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얄팍해지고, 실재보다 이미지에 익숙해집니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이미지들도 쉽게 잊히고, 나중에는 상업적이고 유혹적인 이미지로 변신해 패션의 일부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체게바라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느 누구도 체게바라가 어떤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냥 '멋있는 인물'정도로 생각하고 옷을 입습니다. 체게바라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상업주의에 의해 퇴색되어버린 것이죠. 티셔츠 안에서 웃고 있는 히틀러 얼굴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동안 기억과 회상 등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던 김정선 화가. 그에게 있어 '망각'은 남다르게 고민이 많았던 화두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물었다. 사람들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잊는 것 같지 않느냐고.

"사람들이 쉽게 잊는 것보다는 재편집되는 것입니다. 효순이 미선이 경우도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는 것처럼 망각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이보다 왜 그런 장면들이 떠돌고, 왜 소비적으로 변화되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20대에는 잊힌다는 것이 죽음과 연결된 것이라고 여겨 두려웠지만, 요즘은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잊힘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작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고민했던 부분을 털어놓았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딱히 민중미술도 아닌...'이슈가 없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한때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 대신에 그림 자체로 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