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허연 광주전남 희망연대 공동대표 - 광주의 명예와 멍에를 딛고

이동권 2022. 9. 20. 23:43

2003년 허연 광주전남 희망연대 공동대표

허연 광주전남 희망연대 공동대표를 만났다.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각계 지도자들과의 회의가 막 끝난 뒤였다. 그는 비가 내리는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광주는 노무현 정부를 들어서게 만든 분수령이었다. 열린우리당 경선에서 민중적 사고를 지향하는 다수의 광주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민중의 바람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이 나라의 진보를 바라는 다수의 민중들로부터 만들어진 핸디워크(Handiwork)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 문제로 그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해 한미 FTA 지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60%에 육박하던 지지율도 이제 9% 대로 급락했다.

 

노무현 정권의 행보와 몰락을 지켜보고 있는 허연 대표의 분노는 컸다. '배은망덕'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노무현 정권은 극보수, 보수, 한나라당을 스스로 키워주고 있는 셈"이라며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한미 FTA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정부는 한미 FTA 반대를 '쇄국', 혹은 '나라를 망치는 짓'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죠. 경제학자들, 하물며 청와대 비서진들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요. 노동자, 농민들도 그렇고요. 이러한 상황에도 한미 FTA를 추진하려고 하는 노무현 정부를 우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당장 한미 FTA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허연 대표는 총궐기대회에 참가한 시위대의 폭력성, 도덕성 운운하며 여론을 움직이는 언론들과 수구보수 세력들의 탄압에 적절한 대응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여론 조작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반 시민들을 어떻게 하면 감싸 안을 수 있는지 고민이 많았다. 한미 FTA 투쟁을 지지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는 전체 민중들을 자연스러운 참여로 이끌어내지 못하면 승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우선 그는 광주전남지역의 상황부터 들려주었다.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광주에 대한 선입견이 한미 FTA 투쟁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광주는 명예도 있지만, 멍에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명예라고 한다면 5.18광주민중화운동으로 대변되는 민중의 도시, 민주화의 성지, 문화예술의 본고장이죠.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멍에가 되기도 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 시민들이 데모만 해도 과격하고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총궐기대회에서 광주전남에는 최대 인원이 동원됐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시위의 강도는 매우 약했다. 오히려 경찰들의 폭력과 살기가 거리를 뒤덮었다. 억압받고 있는 농촌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 참여도가 높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언론이나 시민들은 광주시청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냈다. 허연 대표도 "아직까지 시민사회단체나 종교단체에서도 민감한 반응은 아니지만, 이들의 이탈을 막고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앞으로의 투쟁을 평화적으로 이끌어나가는데 주안점을 두겠다"는 생각이다.

"이번 한미 FTA 투쟁에는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나 종교 등 각계각층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미 FTA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폭력에 대해서는 염려를 금치 못하고 있죠. 반대로 노동자, 농민은 22일 총궐기대회에서 뭔가 제대로 보여줬어야 하는데 너무 약했다는 평가입니다. 이처럼 서로의 생각이 엇갈리고 있지만, 범국민적인 투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평화시위를 지향하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참고, 인내하면서요. 아름다운 퍼포먼스나 걷기 대회 같은 행사도 준비할 예정입니다. 지난 18일 남녀노소가 모두 참가한 걷기 대회에서 광우병, 미친소 퍼포먼스와 한미 FTA에 대한 부당함을 알렸는데, 매우 효과가 좋았습니다."

허연 대표는 나주지역 농민회 의장 출신이며, 작년 12월에 출범한 희망연대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희망연대는 광주전남을 5.18 직후의 상황으로 만들자는 의도로 출범했다. 5.18민주화운동이 끝나고 나서 한참 잘 가다가 민중 따로, 통일 따로, 시민사회 따로, 종교까지도 분리됐던 운동을 하나로 모아 한 목소리를 내자는 것. 그는 "희망연대는 이들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만들어졌다"면서 "6.15공동위원회에 이어 이번 한미 FTA 투쟁에도 희망연대가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연 대표가 이번 FTA 투쟁에 왜 참가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자리가 하는 것"이라는 말만 남길 뿐 그 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고통도, 농촌의 현실도 모두 가슴속에 새겨놓고 오직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이라면 그 역할을 다하겠다는 자세였다.

광주시는 총궐기투쟁에서 기물을 파손했다는 죄로 허연 대표를 비롯한 지도자 3인에게 4~5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리고 FTA 반대 시위를 주도한 집행부에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신병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허연 대표는 의연했다. 시청에 진입을 시도한 것이 큰 죄는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는 "집행유예가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걱정"이라면서 "아울러 법으로 묻고 손해배상은 청구할 수 있지만, 광주시가 시위대의 폭력성을 강조해 얻게 될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5.18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