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은 한국화의 가장 보편적인 재료였으며, 그 위상도 대단했다. 그러나 현대 미술은 수묵이 아직도 유효한 매제인지 의문했다. 수묵이 지닌 아름다움이 서양화보다 못한 것이 아닌데도 시대와 문화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국화가들은 수묵의 깊이와 미를 따라올만한 매제를 찾지 못했다. 여러 가지 재료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젊은 작가들도 많지만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발현하는 것에서는 여전히 수묵은 확고하고 단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본아 화가의 그림도 전통 수묵을 기본으로 한다. 먹색의 변화는 자유롭고 유연하며, 과감하고 기세가 넘친다. 그만의 독특한 표현법 때문이다. 이런 오묘한 변화와 신비로움은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두드러졌다. 이때 그녀는 거대한 의미의 자연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을 소재로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어느 숲에서나 볼 수 있는 조그마한 풀과 잡초, 나무 등이 관심대상이며,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별거 아닌 자연'에 많은 애정을 가졌습니다. 식물이 갖고 있는 형태들의 상호보완과 긴장, 단순과 복잡, 혼돈과 질서 같은 모순적인 이미지의 교차를 통해 자율적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었지요."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쉽게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면 현대 사회에서 잊고 지내는 순수한 감정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2년 뒤 구본아 화가는 개인전 '물(物)과 나눈 대화'를 연다. 전작을 통해 "과감하고 짜임새 있는 선율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녀는 이 전시에서 사물 풍경의 혼돈과 무질서의 요소들을 조율해 통일성을 만들어 가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림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여러 사물들과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의 감성과 지각에 대한 문제이며, 나아가서는 개인의 시각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언의 사물과 말한다는 것, 즉 말없는 사물들에게 귀 기울이고 인식의 통로를 열어가는 것이 이미지의 노예로부터, 그림의 강박관념으로 벗어나는 길이죠."
구본아 화가의 생각은 다시 개인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으로 이어졌다.
"작품 구상을 위해 폐허가 된 유적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유독 그곳에 나비들이 많았습니다. 나비는 부활과 탄생을 의미하는 곤충입니다. 자연에 의해 문명이 무너지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해가는 풍경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한때는 융성했던 유적들이 무너진 모습을 보면서 애상을 느끼기도 하고 향수에 젖기도 했지만, 자연에 의해 무너졌다가 다시 자연에 의해 다시 부활하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너지고 부서져서 조각나 있는 서글픈 풍경을 마주치면 황량한 폐허가 주는 무상감에 젖겠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여서 구속, 형식, 틀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또다시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렇다. 우리가 세상과 투쟁하고 일궈내려는 노력도 어찌 보면 보수적이고 형식적인 틀, 구습과 인습에 얽매인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열정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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