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주 화가 작품의 인간은 머리가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덜어내고, 가벼워지기 위해 머리를 없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국 자기부정으로 이어진 셈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누군가가 얘기해주거나, 평가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느끼는 실존감은 백지에 가깝다. 또 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공유해야만 인간은 실존하기 때문에 자신을 A라고 생각해도 타인들이 B라고 규정하면 자신은 B로서 실존하게 된다.
그럼 A는 누구인가. A는 현실 속에 있지만 환상이며, 허깨비가 된다. A는 환영의 복합체로 남게 되며, B는 무수한 욕망의 파편에 쌓여 실존하게 된다. 우리의 진짜 모습은 과연 A일까? B일까? B로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과연 현실일까? 환상일까?
정영주 화가는 자신의 실존에 대해 부정한다.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을 큰 가방에 머리를 숨긴 사람, 천장을 지지하는 기둥이 된 사람 등의 작품으로 형상화했다.
"가벼워지고 싶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그저 제가 이 사회에 필요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좀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결론은 나지 않았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나 조차도 실존하고 있는지 의심이 가더라고요. 현실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많습니다. 작업도 즐겁지 않으면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가벼워지면 편안하고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무게감에서 탈출하고 싶습니다. "
나는 일단 정영주 화가와 만남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짓고 나섰다. 그의 작업과 고민을 충분히 존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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