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발묵과 꾸밈없는 붓놀림으로 한 시대의 단면을 잔잔하게 그려내는 박순철 화가를 만났다. 그는 수묵채색으로 그린 인물화로 사회,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시선을 유지해왔으며, 인물화가로서의 입지도 굳건하게 지켜왔다. 인물의 골격과 음영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생략과 여백을 강조한 그의 그림을 보면 강단 있는 붓질과 자신감 넘치는 화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삭막한 아파트 숲이 멀리 보이는 파주 신도시 외곽에 위치한 박순철 화가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구수하고 입담 좋은 그의 성품 마냥, 앞마당 텃밭에는 그가 직접 기른 배추와 무 등이 푸르른 잎을 활짝 펴고 정겹게 웃고 있었다.
그는 2003년 개인전 '지리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성에 주목했다. 정월 초하룻날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빨치산이라는 누명을 씌어 양민을 학살했던 당시의 상황을 그린 '침묵'이 이를 증명한다. 이 작품에서는 총에 맞고 사투를 벌이다 살아난 단 한 명의 생존자인 그의 '이모' 모습이 더욱 깊은 감명을 선사했다. 하지만 박순철의 근작을 보면 사회적인 역사성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을 탐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습니다. 문명화된 도시, 혹은 자본주의에 저도 모르게 얽매이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술을 하면서 많이 느끼는 것이지만 자본의 힘에 구속되고 눌려 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내면'에서라도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박순철 화가의 고향은 지리산이다. 당시만 해도 서당이 있을 정도로 깊은 산속. 그곳에서 그는 한 많은 역사와 마주하며 자랐다. 그리고 그는 젊은 시절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삶을 이어왔다. (이러한 정황들을 소상하게 말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러한 점에서 비춰볼 때 중견화가로 들어선 지금 "여유를 찾고 싶다"는 그의 말에 이해가 갔다.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목적의식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되는 일상에, 자본주의에 휩싸이게 됩니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386세대의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정치권에 뛰어들지 않았습니까?"
박순철 화가는 중견화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그는 수묵인물화의 가능성과 진일보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의 '중견'은 이 시대를 읽어내는 견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시대의 그림은 상업성과 예술성이 있어야 하지만 예술성과 상업성을 겸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돈'으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콜렉터 중에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투기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다 보면 예술적인 성취는 멀어지고 맙니다. 대학에서도 인문학이나 순수예술 분야를 계속 줄이고 자본의 논리에 의해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디자인이나 상업미술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박순철 화가는 또 젊은 화가들에 대한 따금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젊은이들의 사고, 실험적인 정신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발상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기본기, 역사 인식 등이 부족해서는 안됩니다. 세계화, 국제화되고 있다고 얘기하지 기본을 외면하다 보면 자신의 뜻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면서도 컴퓨터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하고 비슷한 것이지요. 한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들이 이미 해외에서는 깊이 있게 다뤄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화단에 주목을 끌고, 언론에 의해 스타가 만들어지고 있지요. 그리고 화가들이 부화뇌동하면서 아류가 급속도로 생깁니다. 하지만 작가라면 그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지 말고 자신의 예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깊이 있게, 꾸준하게 집중할 수 있는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박순철 화가는 인물의 뒷모습을 자주 그린다. 앞모습은 억지로 웃고, 울고 거짓이 많지만, 뒷모습은 가식이 없다는 이유다.
"뒷모습을 보면 성격과 인품이 느껴집니다. 자연스럽게 인물의 뒷모습을 많이 그리게 됐습니다. 심도 있는 작품 활동을 위해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해갈하기 위해서죠.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좋지만, 관람객들이 즉흥적으로 느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림을 그리면, 그림을 잘 모르는 집사람에게 먼저 물어봅니다. 어떠냐고요. 제 그림은 인물화이기 때문에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소설과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나름대로 역사가 있지요. 그래서 누구나 제 그림의 소재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배울게 많습니다. 노인에 대해 특히 그러합니다. 주름진 얼굴, 체형에서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모두 느껴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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