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푸른 햇살이 남도의 시원한 바람을 타고 대나무 숲을 쓸고 지나간다. 녹음으로 번진 산천은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구성진 가락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어제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비를 몰고 다니면서 습한 바람을 쏟아낸 탓에 괜히 몸과 마음이 시렸지만, 오늘은 대나무 잎사귀들이 햇볕에 부서지며 반짝이고 있어 마음이 한층 밝고 편안해진다. 참으로 소박하고 서정적인 날씨다.
나는 먼 여정을 마치고 정겨운 고향에 돌아와 야릇한 정취에 푹 빠진 사람처럼 전원의 향수에 젖었다. 가정을 꾸리고 그 속에서 안주하길 바라며, 더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길을 열심히 달리다 잠시 쉴 때 찾아오는 환희를 순간 만끽했다. 자연의 생동감을 향유하는 느낌,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아끼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낯선 것을 사랑하게 하는 청빈의 힘,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가.
어쩌면 감정에 집착하고 휩쓸리면서 흔적을 만들어내는 사랑이라는 것은 대단하지 않다. 하루에도 수만 번씩 바닷속에서 떠오르는 허연 포말처럼 공허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연이 옷을 바꿔 입듯이 자신의 빛과 촉감, 생각과 느낌이 변하게 되면 결국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는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자신을 버리고 헌신하며 존경하는 마음이 아닐까? 진정한 사랑은 홀로 서있을 수 있을 때, 갈망하고 소유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홀로 꿈꾸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과 안락이 있는 것 같다.
녹색으로 물든 작은 길 위로 마른 바람이 불어온다. 잔 대나무 잎이 아스라하게 서로 엉켜 흔들리며 고요한 소리로 잠든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깨운다. 이 바람은 담 밑으로 오롯이 흐르는 계류와 소록소록 소리 내며 떨어지는 자연폭포의 생기를 재촉하고 마른 이끼들이 붙은 크고 작은 바위틈새, 푸르고 한적하게 사방을 채운 원림, 고행과 명상으로 인사의 무게를 인내하며 달려온 물레방아에게 초록빛 향기를 선사한다.
조선 중기의 대표 정원이자 우리나라의 최초 정원인 소쇄원은 자연 친화적이고 은둔적인 한국 정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정결하면서도 소담스럽게 지어진 광풍각, 정지된 세월을 연출하는 외나무다리, 안빈낙도의 청렴한 기백으로 호방하게 쓰인 명판들, 고풍스럽게 마모되고 퇴색된 지붕과 기둥, 소박한 사색의 여유를 만들어주는 제월당 마루 바닥, 산새 소리와 향긋한 내음으로 가득 찬 산수유와 매실 꽃, 나무 관으로 물을 댄 작은 연못 등 저마다 자기 이름으로 세월을 걸어오면서 원숙미를 자랑한다.
속세의 화려한 속삭임과 찬란한 유혹을 거절하고 자연과 벗하면서 맑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낮은 돌담 사이를 한가로이 걷거나, 광풍각에 앉아 곡차나 엽차 향이 피어오르는 상상을 하니 내가 꼭 옛 선비가 된 듯해 한층 더 애정이 깃든다. 오랫동안 정다운 시선으로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작은 풀잎 하나까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물은 변함 없이 흐르고 산은 영원히 푸르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게 된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날이 올 때까지 자신의 길을 향해 달려가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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