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여행과 사색

밥줍기 - 소확행 여행의 즐거움

이동권 2022. 9. 7. 22:28

익어가고 있는 밤


전국 방방곡곡에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산과 들엔 녹음이 번지고 청자, 백자와 같은 하늘이 뒤덮여 만취한 가을을 선사한다. 밤과 대추가 무르익고, 한가롭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길목이 가을의 정열을 불태운다. 3년 만에 인원 제한 없는 가족모임이 가능하고, 여행도 자유롭게 떠날 수 있어 더욱 기대되는 가을이다. 

세상엔 정말 사소한 것이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밤줍기 여행이 바로 그런 것 같다. 시베리아의 청정수 바이칼호나 알래스카의 거대한 빙하산으로 떠나는 여행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적은 비용과 부담 없는 시간으로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여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이라고 하면 한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넋두리처럼 푸념한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은행나무의 오롯한 열매를 못 볼 리 없고, 스쳐가는 가을바람이 닿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 속의 아름다운 삶의 정경을 놓칠 리 없다.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국내여행은 마다하고 유럽으로, 미주로, 하다못해 동남아시아라도 다녀와야 여행이라고 고집하는 것도 지나친 생각이다. 하긴 요즘에는 흔에 빠진 게 여행이어서 아프리카나 남미라도 다녀와야 여행 좀 했다는 행색을 낼 수 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외면한 채 틈만 나면 괌이나 사이판 같은 이국의 바다에서 놀다 오면서, 과연 무엇을 얼마나 보고 느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찾아간 곳은 천안시 북면 납안리 277-2에 위치한 유성농원이다. 단일 밤농장으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서울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무난하게 갈 수 있다.

녹음이 짙어가는 유성농원은 부드럽게 세월을 어루만지며 가을의 흥취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내 맡은 벌이 붕붕거리며 귓가를 간지럽히고, 정겹게 세상을 굽어보는 밤나무들이 웃음을 던졌다. 

가을에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쓸쓸함이 도사린다. 풍성한 과일과 아름다운 단풍이 가을색(色)을 뿌리고, 산들바람이 거친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지지만, 삶은 연습으로 사는 세월이 아니라는 생각에 시간 가는 것에만 민감해진다. 한편으로는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대하지 않았던 마음이 옹색하게 느껴져 울컥해지기도 한다. 한 번 사는 세상인데 말이다.

"비탈진 산기슭마다 밤이 떨어져 있어요. 산책을 하면서 밤을 주으면 됩니다." 

도시 사람들에게 '밥줍기'는 단꿈을 꾸는 것처럼 즐거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서 밤을 따다 보면 쉬지 않고 변해가는 세월도 잊고 맘껏 웃을 수 있으며, 고난을 이긴 성숙한 가을의 열매가 주는 지혜에 마음이 포동포동 살찐다.

"밤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천천히 즐기며 망토를 채우면 됩니다.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가실 때 농장에서 준비한 밤으로 망토를 채워드리니 걱정하지 마세요. 또 어린이들에겐 가족의 소중함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배우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밤은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기운을 돋우는 약으로 쓰이는 과일 중 으뜸이다. 그래서 삼계탕 같은 약(藥)식에 빠지지 않는다. 또 쫄깃한 질감과 구수한 맛이 일품인 느타리버섯과 함께 구워 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