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부도에 들어갔을 때는 하루 내내 바다가 갈라지는 해할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조금 때였습니다.
(해할 현상은 썰물 때 주위보다 높은 해저 지영이 해상으로 노출돼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자연현상이다. 우리나라에는 진도, 여천, 무창포, 해간도, 제부도 등 해저 지형이 복잡하고 조차가 큰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바다 사이로 잠겼을 시멘트 길을 따라 제부도로 들어갔다. 이미 밤이 깊어 바다인지, 길인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도시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방랑의 아름다움을 찬미했을 때와 같은 추억이 떠오르게 했다. 그 아찔함과 포근함. 한 움큼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어도 아깝지 않은 그 느낌. 그러나 제부도를 향해가는 차창 밖에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깊은 사랑을 찾아 헤매는 영혼들이 가득했다.
나, 어떻게 이 길을 되돌아갈까? 이 바다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까?
나는 수평선 너머, 파도마저 잠든 고독한 바다를 바라봤다. 한줄기 빛이 청신한 바람을 타고 볼을 스쳤다. 그 빛은 거울처럼 나를 똑같이 투영해내면서 어둠 속을 헤매는 내 영혼에게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했다.
바다에는 시간이 없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영원한 현재만을 보여줬다. 과거에 대한 집착도, 미래에 대한 헛된 꿈도 없이 현재를 만들었다. 우리 삶도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 현재에 과거와 미래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를 아는 현명한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지도, 미래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오직 현재와 진지하게 만난다. 오늘의 나와 만날 때, 그 진실의 무게를 이겨낼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도 만나고 얘기하면서 오늘을 채워가면 된다.
나는 무작정 떠나온 바다 앞에서 곤한 일상의 매듭을 풀었다. 홀로 하늘을 나는 갈매기들과 인사하며 뭔가 해보겠다고 요란스럽게 사는 나를 꾸짖기도 하고, 만물의 흐름에 잠식돼 표류하는 내 본모습을 찾기도 했다. 그러자 천천히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제부도의 바다는 제주 바다처럼 깨끗한 편은 아니지만 기린 목처럼 길게 늘어지는 낙조를 벗 삼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파도치는 바람을 바라보며 통통하게 익은 굴밥과 갖은 생선회, 조개구이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굴과 조개가 바위에 눌어붙어 사는 갯벌은 아이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손색없고, 구름 없이 화창한 날 해가 넘어가는 일몰은 구경할만하다.
제부도 남쪽 가장자리엔 자유롭게 솟아오른 여러 바위들이 생동감 넘치는 바다를 연출한다. 그중 가장 큰 바위는 앉아있는 매의 모습과 흡사하기도 하고, 예전에는 매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친 곳이라 하여 매바위라고 부른다. 매바위는 썰물 때 밑바닥까지 자신의 모습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의 포토존으로 인기 만발이다.
매바위 옆, 서쪽 해안선을 따라 1km가량의 해수욕장이 길게 자리 잡고 있다. 해수욕장은 시화방조제가 만들어진 뒤 모래와 개펄이 거칠어졌지만, 한나절 서울을 빠져나와 바다의 싱그러움을 느끼며 해수욕하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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