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도서관으로 향하는 여학생들의 발걸음이 지쳐 보였다. 입시와 취업에 매몰된 학생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쳤다.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정신의 밑바탕이라고 했는데, 자본의 잣대로만 돌아가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생각해보니 눈앞이 암담하고 막막했다.
류태호 교수가 체육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그를 만났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체육인 시국선언'할 때 보니, 그때는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다.)
체육시민연대는 2002년 창립한 스포츠 분야의 한국 최초 시민단체다.
"체육시민연대는 국가대표 수영선수 장희진 학생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태릉선수촌에서 합숙 훈련 중 장희진 학생이 중간고사 시험을 보고 오겠다고 나가자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학생이지만 운동선수라는 이유로 학생 신분을 박탈당한 거죠. 엘리트 체육 교육 때문입니다. 엘리트 체육 교육이 아이들을 전사로 키우고 있어요. 거의 실미도 수준입니다. 엄연한 인권유린입니다. 엘리트 체육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사람은 없고 운동만 있습니다. 체육시민연대는 운동선수를 학생선수로 만들어가고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데 경주하고 있습니다. 기형적인 시스템과 구시대적인 문화가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는 한국 체육계의 체질 개선이 필요합니다. "
체육시민연대가 문화관광부와 체육계를 싸잡아서 비난하고 나섰다. 이 사건의 발단은 회장 대행체제로 이어오던 국민생활체육협의회가 대의원 총회에서 이강두 한나라당 의원을 회장으로 선출하자 문화관광부가 '정치적 중립'을 명분 삼아 회장 승인을 거부한 것에서 비롯했다. 체육시민연대는 비난의 화살을 양쪽으로 겨냥했다. 이때까지 문화관광부는 체육계 지도층 선임 과정에서 관리감독과 중재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무소신, 무원칙으로 일관해 이런 일이 벌어지게 했고, 체육계는 투명성과 민주적 절차가 결여된 상태에서 정치인들을 수장으로 임명해 도덕성, 전문성을 상실한 기형적 체육 구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류태호 교수는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거래가 내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예전부터 스포츠는 저항적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꼭 이겨야 한다는 저항적 측면이 강했죠.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운동하는 사람들을 전사로 키워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했죠. 국제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승리'가 곧 정치적인 위상으로 '상징화'되어 버리는 메커니즘이 있거든요. 그래서 체육 인프라나 체육에 대한 국민의 의식 수준은 낮지만 성적만으로 보면 한국은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스포츠 강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부문보다 체육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많습니다. 체육은 대중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정치인이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지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전문체육인이 체육계 단체장을 맡았으면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라고요. 아직까지 해보지 못해서 뭐라고 결론을 내기 힘들지만요."
류 교수의 말에서 알 수 없는 한 숨이 뒤섞이며 흘러나온다. 거물급 정치인 회장에게 구걸하면서 지탱해온 체육계가 스스로도 용납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류 교수는 강렬하고 또렷한 어조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연맹 회장들의 투표로 대한체육회나 국체협 회장을 선출하는 방식은 전근대적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선진 시스템을 도입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 실현 가능성 없는 대한체육회와 국체협의 통합도 고려해야 할 것이며, 각종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체육계의 관행도 근절시켜 나가야 합니다. 개인이나 단체가 나설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국가가 나서서 '체육단체 구조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체육계의 민주화와 구조개편을 위해 개혁을 단행해야 합니다. 문화부의 국체협 회장 승인 거부 사태가 여야 간의 정치적 공방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류태호 교수는 체육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정치인들이 체육계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해 반감을 표했다. 체육계 지도층 인사에는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가진 인물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체육단체의 수장을 반드시 체육계 인사로만 채워야 하는 것에도 난색했다. 체육계에도 학연과 지연에 따른 파벌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 그는 "쇼트트랙 국가대표들의 출신학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각기 다른 감독에게 훈련을 받기도 했다"며 혀를 찼다.
"신임 있는 인물이 수장이 되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일을 잘하면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체육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못하니까 줄서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엘리트 중심의 체육 정책에, 체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수장들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체육 발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수장이 되어야 합니다. 설사 그가 정치인이더라도 정치적인 면을 배제할 수 있는 비전과 소신이 있어야 하고요. 정치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무관하게 체육계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깨끗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그는 체육의 발전을 위해 독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누려야 할 권리가 체육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체육을 즐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별다른 기회비용을 들이지 않고 체육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체육 정책에 관심을 갖고 대학, 지자체 등에 필요한 것은 요구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지도자를 배치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도록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체육이 민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류태호 교수는 시종일관 꼼꼼하고 정열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시키려는 유희를 즐기는 것처럼 대화를 끊고 맺는 절제가 넘쳤다. 아무리 사소한 질문에도 각기 나름대로의 대답이 있듯이 그는 빠짐없이 하나하나 중요한 지점을 짚었다. 아끼는 후배의 답답함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처럼 말이다. 류태호 교수와 체육시민연대가 한국 체육계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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