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휘 소설가를 만났다. 구불구불하게 말린 반곱슬 머리카락 밑으로 또렷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예지 넘치고 강단 있는 소설가로서의 풍취가 느껴졌다.
이인휘 소설가는 차분하고 냉철한 필력으로 민중의 삶과 고통을 여과없이 파헤친다. 마음을 움직임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에 철저하게 순종하지만 가볍게 움직이는 법이 없으며, 정의롭지 않은 일에 맞서 싸우는 일에는 물러섬이 없다.
이인휘 소설가는 소설 '내 생의 적들'으로 핏빛 얼룩진 국가보안법과 정면으로 맞섰다. 한 청년이 국가보안법'의 올무에 걸려 찬란했던 젊음이 찢기고 뒤틀리는 과정을 환멸과 역겨움으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는 여기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주인공의 삶을 산산이 무너뜨린 '적'의 실체를 더듬어갔다. 또 자신의 존재를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투쟁과 사랑의 기치를 깊숙이 끌어내 당당하게 싸웠다. 과거 국가보안법은 민주인사들을 제거하는 독화살로 악용되면서 많은 이들을 연루해 괴롭히고 죽였으며, 지금도 여기저기 닳고 낡은 상처를 계속 만들어내며 존속되고 있다.
'내 생의 적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광훈은 이인휘 소설가와 중첩된다.
"김광훈은 비록 소설속에서 가상으로 창작된 인물이지만 40%는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정신과 신념, 경험 등이 소설 속에서 그대로 묻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는 다리를 절뚝거렸던 한 장애 여성 때문입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25년이 흘렀지만, 늘 5월이 되면 그녀가 생각나거든요. 아직도 그녀와 헤어졌던 마지막 새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80년 광주의 상처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음을 그녀를 통해 확인했다. 매년 5월이 되면 자신의 내면에서 외치는 음성에 침묵할 수 없어 광주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내 생의 적들'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데로,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대로 썼고, 그래서 경어체가 됐습니다. 이 책이 발간된 뒤 펼쳐보다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와 참을 수 없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이인휘 소설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야학에서 공부하고 대학에 갔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군대로 피신했다. 제대 후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을 떠돌다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파업 투쟁 중 박영진의 분신으로 충격에 빠져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그는 광산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활화산', 수배당한 노동운동가의 삶을 담은 '문 밖의 사람들' 등을 발표했다. 진보 생활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고 6년 동안 이끌어오다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8년 만에 새 소설 '내 생의 적들'을 발표했다.
이인휘의 소설 '내 생의 적들'은 이미 7쇄를 발간했다. 스터디 셀러가 된 셈이다. '날개달린 물고기'도 4쇄를 찍었다. 그럼에도 전업 작가들의 주머니 사정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있을까?
"'내 생의 적들'의 판매 부수가 늘어나면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문학을 할 수 있었던 버팀목은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와 동지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평생 내가 해야 할 일은 '문학'밖에 없습니다. 현장과 민중의 문제를 담아내고, 그것에 깊게 파고 들어가면서도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행동했으면 합니다. 자기 표현을 주저하지 말고 자기의 생각을 정직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넓고 깊어야 합니다. 자기의 인생을 끌고 가는 마음은 자기의 마음 닦음에서 우러나야 하죠. 비겁하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살아요. 자기 마음의 소리를 잘 듣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벼우면 휘둘려요. 마음의 중심을 튼튼하게 하고, 책도 많이 읽고요."
내 생의 적들 줄거리
사십대 중반의 김광훈이 한밤중에 가리봉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나경중이라는 사내가 가리봉 오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부수려다 잡혀와 있다.
나경중은 아내의 친구 남편으로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으로 뛰어든 사내다. 오래전 아내를 통해 알게 된 이 사내는 자폐아를 낳고, 뒤이어 쌍둥이를 갖게 되면서 생활고에 허덕이다, 결국은 한 조직을 이끌던 리더의 자리를 내놓고 모든 운동가들과의 교류를 끊고 살아간다.
파출소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인적이 끊긴 밤거리를 걷는다. 가리봉 오거리는 화려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차 있다. 오래전 일공단, 이공단, 삼공단으로 불렸던 거리가 어느 날 슬며시 디지털 일번지, 이번지, 삼번지로 바뀌어 이정표에 박혀 있다.
나경중은 사거리에 서서 독백처럼 말한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나라는 존재가 있기나 한가 싶습니다. 여기서 한 블록만 넘어가면 내가 살고 있는 집이고, 그 허름한 집과 내 사는 모습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저 거리는 디지털 거리로 첨단 산업단지로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며 내가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은 지 이십사 년. 그 이십사 년의 세월을 두고 저 거리와 내가 살고 있는 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혼란스럽더군요. 도대체 이십사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경중은 쓸쓸한 웃음을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김광훈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절망에 젖어 사라져 가는 나경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1980년 5월에 만났던 한 여자를 떠올리며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김광훈은 산동네 꼭대기 집에 살던 가난한 도시빈민의 자식이다. 공장을 다니며 야학에서 공부하여 대학까지 갔지만, 생활이 궁핍해 학교 서클룸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고 있다.
시인의 꿈을 키우며 문학서클에 몸담고 있던 김광훈은,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적 실존주의에 경도되어 역사라는 것도 늘 반복될 뿐이어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며, 세상과 철저하게 거리를 둔다.
그런 그가 1980년 5월 17일 밤에 같은 서클 친구이자 총학생회 간부였던 이상현과 함께 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끌려간 후, 자신과 관계없다고 믿었던 현실에 의해 짓밟히기 시작한다. 이상현의 의문의 죽음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불순분자로 몰려 강제징집을 당했는가 하면, 국가보안법 7조 고무찬양죄를 뒤집어쓰고 남한산성까지 끌려가게 된다.
모든 형기를 끝마치고 세상 속으로 나오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가슴앓이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확인한다. 절망과 비애에 싸인 그는 자포자기 상태로 자신을 방치하고, 안기부에서는 여전히 그를 관찰 대상으로 삼아 협박하며 사람들과 단절시키고자 한다.
그는 안기부의 감시를 피해 구로공단을 떠돈다. 피폐한 삶 속에서 병을 얻고 절망하던 김광훈은, 1980년 잠시 들렀던 적이 있던 친구의 집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며 지낸다. 다시 살아갈 희망을 붙들려고 애쓰던 무렵, 한 여자가 김광훈을 찾아온다. 그는 그녀를 통해 8년 동안 자신이 알 수 없었던 진실에 접근하게 되고, 그 진실의 실체를 파헤쳐가면서 결국 사회와 무관한 존재는 없으며, 사회의 불행이 곧 개인의 고통과도 닿아 있음을 깨닫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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