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포이동 266번지

① 포이동 266번지 - [르포] 강제이주, 인권유린 그리고 가난의 세월

이동권 2022. 8. 30. 19:54

전두환 정권이 1981년 국민을 강제이주 시켜 생긴 마을이 포이동 266번지다. 지금은 행정구역 상 개포동이지만 '포이동 재건마을'로 불린다. 국토부는 2018년 포이동 재건마을 부지에 신혼희망타운을 지어 2022년부터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서울시와 강남구청은 재건마을 주민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고 외면했다. 주민들은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토지변상금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다. 

 

마을회관

 

저 너머 높게 솟아오른 타워팰리스의 그늘에 밟혀 자기 집 지붕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붙어살지만 정답고 훈훈한 정을 나누며 사는 공동체, 포이동 266번지를 찾아갔다.

큼직하고 견고한 서울 강남의 건물들을 지나 '길이 없음'이라고 적힌 곳에 도착하면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작은 비포장 골목이 나온다. 이곳은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면 아지랑이처럼 먼지투성이가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멀리 마을회관으로 보이는 3층짜리 가건물이 눈에 띤다. 주민들을 쫓아내기 위해 갖은 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공권력에 맞선 투사처럼 강건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다.

길가에는 강남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주워 모아 팔고 있는 넝마주이 몇몇이 허리를 굽혔다 펴며 무거운 짐을 옮겼고, 한 할머니는 낡아빠진 외투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낯선 사람의 방문을 경계하는 듯 개 한 마리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마구 짖자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공동 우편함에서 자신의 편지를 확인하던 한 주민은 자신의 뒷모습이라도 사진 찍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동안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핍박의 상처가 그대로 느껴져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공동 우편함


2004년 6월 4일 새벽 포이동 266번지에 살고 있던 넝마주이 50대 남자가 자살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청소일을 하던 부인도 자살했다. 병원비가 없어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집에서 투병생활을 해오던 남편 병치레 때문에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부부는 강남구청에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었다. 두 아들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군 복무 중이었다.

부부가 자살하던 당시  살았던 집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부부가 죽은 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새 집을 지어주었다. 두 아들에게 부부가 남긴 것은 부모를 잃은 슬픔과 가난, 체납변상금, 상속포기 등의 절망뿐. 한 가족처럼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던 마을 주민들로서는 뭔가를 해주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주민들은 "남편은 죽기 전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그토록 몸부림을 쳤지만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면서 "죽기 전에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아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또 "부인은 그동안 동사무소를 방문해 남편이 치료를 받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몇 번이고 사정을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한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아들은 자기 부모도 부양하지 못하고 나라를 지켜야 했으며, 부모가 죽은 뒤 부양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의가사제대도 하지 못했다.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집주소가 없어 우편물이 배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을회관에 우편함을 만들어놓고 자신의 우편물을 알아서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또한 수세식 화장실도 마을회관 한 곳밖에 없다. 주민들은 모두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한다.

주민들은 2000년 초까지만 해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이 우물은 식수로 사용하기에 매우 더럽고 이물질이 많았다. 하지만 달리 물을 댈 수 없었던 이들은 20년 넘게 우물물을 먹고살면서 갖가지 지병을 얻게 됐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비좁다. 길이 아닌 것 같은데도 길이며, 길인 것 같은데도 마당이다. 방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들어가야 할 만큼 낮았으며, 따로 신발 벗는 공간이 없어 흙먼지가 곳곳에 묻어 있다.

주민들 대부분은 일터에 나가 만날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넝마주이 아들을 기다리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김유순(75세) 할머니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김유순 할머니에게 몸은 괜찮으시냐고 묻자 "고생을 했어도 오질라게 했다"면서 "여기서 산지 25년이 됐는데,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등뼈 7개가 무너져 내려 허리도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한 번은 긴 호수를 사서 부잣집에 물을 대다 쓰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물을 안 줘요. 거지 같다고요. 제가 이라고 살아요."

김유순 할머니는 목이 메었는지 말을 잇지 못하다가 손등으로 마른침을 닦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막내아들을 잃어버리고 10년을 찾았어요.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여기서 고물질하고 있을지 어찌 알았겠어요. 아들이 혼자 있어서 여기에 들어와 함께 살아요. 그런데 나이가 마흔두 살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가고 있어요. 세금도 내고 군대도 가고 그란디 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주지 않는지 모르것어요. 강제로 이주시켜놓고 나라 땅 썼다고 돈이나 내라고 하고. 돈 없고 배운 게 없다고 못 살게 굴고, 무시하고, 때리고, 그라믄 안되지요. 천벌을 받을 거에요."

포이동 266번지. 여기도 강남이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랑자, 전쟁고아, 넝마주이, 도시 빈민들을 한 곳에 모아 살게 하는 이주정책을 펼치면서 이들을 서초구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서 생활케 했다. 그러나 1981년 이들은 10개 지구에 나뉘어 강제 이주됐다. 지역주민들의 집단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강제이주를 명했다.

포이동 200-1번지로 강제이주를 당한 주민들은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이곳에 정착했다. 이들은 전기나 수도조차 없는 비닐하우스에서 살며 '자활근로대'라는 신분증을 소지하고 관리, 감시를 받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에는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밖출입을 금하는 인권유린을 당했다. 심지어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으며 옥살이를 하거나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집을 짓고 빠듯한 살림살이를 일궈가며 현재의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다.

1989년 서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정부는 주민들에게 자활근로대를 그만두겠다는 사표를 강제로 쓰게 했다. 주민들은 이제 관리 감시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응했지만, 얼마 후 정부는 간악한 속내를 드러냈다. 자활근로대 증거를 모두 없애고 주민들을 무단 침입자로 몰아 이곳에서 내쫓으려고 한 것이다. 정부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벌여 200-1번지 주소를 말소하고 266번지를 새로 만들어 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현재 주민들의 주민등록에는 지도에도 없는 포이동 200-1번지 주소가 찍혀 있다. 정작 포이동 266번지는 거주하는 사람도, 건물도 등재되지 않은 '빈터'로 돼 있다.

아울러 정부는 주민들에게 천문학적인 토지변상금을 물려 이곳을 떠나라고 협박하고 있다. 토지변상금은 가구당 7,000여만 원에 이른다.

정훈제 빈철연 선전국장은 "강남구청이 포이동 266번지 땅을 구획정리하면서 주민등록을 박탈하고 무단 침입자로 몰아세워 토지변상금을 물렸다"면서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고, 우편물이라도 제대로 받아볼 수 있도록 하루라도 빨리 주민등록을 등재하고, 토지변상금을 없애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강제로 이주시켜놓고 이제 와서 나가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우리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부자들의 나라 강남땅 한편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동네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물이 웃음으로 바뀌는 날은 언제쯤일까. 이들의 얼굴은 오히려 모진 비바람에도 몸을 일으켜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되어 간다.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겠다는 '분노' 때문이다.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자 가뜩이나 흐린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