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우리 안의 친일문화

[친일공연예술] 근대연극사의 비극 이끈 유치진

이동권 2022. 8. 27. 16:58

유치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치진은 1974년 운명하기 전까지 연출, 평론을 비롯해 우리나라 연극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자 희곡 작가로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 중에 하나다. 3.1 운동을 주제로 한 <조국>이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을 주인공으로 한 <원술랑>같은 작품은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유치진의 삶과 문학을 평가할 때 피해 갈 수 없는 가장 큰 논란은 친일행적이다. 

이재명 명지대학교 교수는 70~80년대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유치진의 '조국'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면서 그동안 선배 연구가들에 의해 한국 연극사가 얼마나 왜곡돼 왔는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이냐 친일이 아니냐는 논쟁을 떠나 사실마저도 왜곡됐던 지난날 연극계의 현실을 질책하는 이야기다.

"조국의 내용을 살펴보면 억압받던 시민들이 3.1 운동을 일으키고 일본 헌병이 함께 만세를 부른다는 내용입니다. 이 얼마나 희화적인 내용입니까. 현실인식이 없는 작품인데, 선배 연구가들은 그 작품을 최고 작품으로 평가해 왔습니다. 반면 해방 이후 좌익활동을 하고 월북했던 함세덕의 작품 '기미년 3월 1일'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선배 연구가들은 유치진의 작품에 맞서기 위해 함세덕이 이 작품을 발표했다고 주장했지요. 하지만 시기상으로만 봐도 맞지 않습니다. 함세덕의 <기미년 3월 1일>이 발표된 해는 1946년이며 유치진의 <조국>은 1947년이거든요. ‘친일청산’도 청산이지만, '이념'이라는 정치적 잣대로 문학적인 평가마저 왜곡됐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당시 자료가 없어서 심도 있는 연구도 어려웠고요."

유치진은 1930년대 신극운동을 주도했던 연극인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서 국민극 운동의 선봉에 선 극단 '현대극장'을 이끌면서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등을 발표하고 친일 작가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재명 교수는 "유치진은 1930년대 식민지 통치하의 실상을 광명과 희망이 없는 현실로 인식하다가 1940년대에 갑자기 광명의 날이 가능하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치진의 1930년대 작품 <소>는 어두운 현실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조선 농민들의 실상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스라하거나, 자포자기의 몸부림으로 지주 곡간에 불을 지르며 빛을 발할 뿐입니다. 또 다른 1930년대 작품 <개골산>에서도 역시 패망할 위기에 있는 신라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소수의 태자 일행이 국난을 극복할 계획과 행동을 결행하지만 역부족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빛을 찾을 듯한 장면이 연출되나 이내 절망 속에 사그라들고 맙니다. 1930년대 유치환의 작품은 '일점의 광명'이 없는 비극적 인식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치진은 1940년 극단 '현대극장'을 통해 <흑룡강>과 <대추나무>를 발표하면서 달라진다.

"<흑룡강>에서는 조선 청년들이 온갖 고난을 겪지만, 추운 겨울밤 야음을 틈타 적을 무찌르고 적을 회유시켜 새로 건설될 만주국의 희망을 전합니다. <대추나무>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청춘남녀가 무지몽매한 지주의 반대와 완고한 부모세대의 이기적인 고집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사랑을 이끌어내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40년대 작품에서는 일제가 표방한 대동아공영권 주장 및 오족협화의 이념과 일맥상통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하고, 한민족을 내선일체화시키고, 나아가 침략전쟁의 야욕을 구현하기 위해 조작해낸 이념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유치진이 만들어낸 주동인물이 현실 저항적인 아웃사이더에서 지극히 현실참여적인 친일 지도자로 탈바꿈한 것이죠. 작품 <흑룡강>의 주인공 성천은 만주국 건설의 꿈을 지녔습니다. 그 믿음 뒤에는 일제의 든든한 군사력이 바탕에 깔려 있지요. 이처럼 그는 신생 식민지 개척의 최전선에 나서는 '신청년'의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피식민지로서 조선의 자기 위치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내선일체를 넘어 멸사봉공의 신념을 지닌 신식민지의 개척자요 계몽자로서의 이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며, 아시아 내부에서 일본을 정점으로 한 위계화, 즉 일본-조선-만주 등의 신생 식민지로 구분되는 정치적 위계화를 실천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연극인들은 국민연극(친일연극)에 종사했다. 일제의 통제와 탄압이 가장 심했던 1940년대 들어 공연이 취소되거나 투옥된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조선 공연예술가들이 얼마나 친일에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국민연극을 이끌어온 유치진의 행위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유치진의 연극은 시루에서 자라는 콩나물과 같이 친일의 테두리에서 성장한 조국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고 있으며 근대연극사의 불행과 함께 한다. 그리고 해방된 후 친일 청산이 유야무야 돼 영영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문화를 생산해내는데 실패했던 우리의 과제와도 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