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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공연예술] <인터뷰> 이재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처음엔 대중과 만나기 위해 친일했다

이동권 2022. 8. 27. 16:38

이재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문학평론가


친일인명사전편찬작업에 참여한 이재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만나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연예술과 친일예술인의 내적논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이 교수는 '해방 전 공연희곡집 시리즈 10권'을 발표해 이제까지 끊임없이 제기돼왔던 근대연극사 논쟁에 일침을 가했다.

 

'해방 전 공연희곡집 시리즈 10권'은 한국학술진흥재단 한국 근현대 연구 지원사업의 연구수탁과제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공연희곡 대본과 시나리오 대본을 발굴해 왜곡되고 뒤틀린 근대연극사를 바로 잡는 역할을 했으며, 이재명 교수의 뚝심과 학자적 열정을 증명하는 결과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가치는 자료의 양적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잃어버리고 잊혔던 우리 연극사를 되찾는 전기를 마련하고 연극사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좌파, 월북, 공산주의 등 이념의 멍에를 짊어진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박영호, 송영, 임선구, 김건, 남궁만, 김승구 등의 작품과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또 이 책은 신파극, 친일극, 월북 극작가 작품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재정립, 평가하는 계기가 됐으며, 옛 자료를 훼손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를 옮겨 한국 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기는 역사적 자료로도 평가받고 있다.

일제의 폭압이 가장 심했던 1940년대 들어 문화통제 정책도 극단적인 양상을 보인다. 일제는 '친일 동화주의'에 입각한 직접통치체제로 지배방식을 고착화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참하도록 했다.

"일제는 조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정치, 경제체제는 물론이고 역사, 문화, 관습, 언어에 이르는 모든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철저한 일본화, 일본인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해 나갑니다. 국민총력운동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며, 모든 예술분야가 영향을 받게 되지요. 특히 침략전쟁을 위한 공출, 증산 등의 경제적 수탈을 높이면서, 조선인들의 정신적인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하기 위해 공연예술을 전시 선전도구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공연예술가들이 친일로 들어섰던 일제 말기에는 모든 사회가 그렇게 갔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연극계만 빠질 수 없었습니다. 공연예술가들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무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관이 무대를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관의 지침을 따라 공연을 하던지, 아니면 공연을 아예 그만두던지 하는 갈림길에 봉착했습니다. 생계형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출세지향적인 부분도 있었고요. 이러한 이유로 몇몇 예술인들은 노골적으로 친일에 나서기도 했는데, 임선규, 송영, 유치진 같은 인물들이 그러했습니다. 유치진의 극단 '현대극장'은 의도적으로 '국민연극'을 표방하면서 '국민연극연구소'를 만들었고, 창립작품으로 친일 작품 '흑룡강'을 공연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유치진은 연극계 최고의 헤게모니를 쥔 인물이 됐지요. 이후 유치진은 관 주도로 시찰도 하고 강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초기에는 자발적인 친일이 많지 않았다. 그 당시 연극계는 전문적인 연극이냐, 상업적인 연극이냐에 관심이 많았지, 친일연극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몇몇 예술인들은 연극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였다. 그러나 카프의 활동은'검열'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후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민중들에게 더 나은 길을 제시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사상전향을 한 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1939년 '협동예술좌', 1940년 '조선연극문화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노골적인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이 협회는 일제의 '국민총동원운동본부' 산하기구였습니다. 이어 친일의 정점에 다다른 공연예술이 바로 '연극경연대회'였습니다."

해방 이후 월북한 작가들의 극작품들은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다. 이제까지 극작가들과 작품들의 존재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유치진을 중심으로 재편된 분단 이후의 남쪽 연극계가 박영호를 비롯해 주요 극작가들을 우리 희곡사와 연극사에서 말살해 버리는 잘못을 범한 것도 그 이유다.

"작가 박영호는 1930년대부터 카프에서 극작 활동을 했으며, 이후 대중극작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극단 중앙무대와 고협, 아랑 등에서 활약하면서부터 친일극작품을 발표했고 해방 후 월북하여 창작활동을 이어 나갔지요. 그러나 박용호는 이념극작가에서 대중작가로, 이어 친일극작가에서 월북극작가로 낙인찍히면서 그 족적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월북작가 송영, 임선규, 함세덕 등 주요 근대극작가에서 찾아볼 수 있죠. 남한 연극계의 대부격인 유치진과는 매우 다른 행보를 한 것입니다. 임선규라는 작가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지만 월북한 후 연극사에서 잊혔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임선규를 최고의 작가라고 칭합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그의 작품입니다. 배우 고설봉 씨가 '동학당'이라는 육필원고를 보여줘서 발굴한 작품도 있습니다. 초서체로 흘려 쓴 대본이라서 사장됐던 작품입니다. 이 원고를 제가 지면에 옮겨 발표했습니다. 1993년 12월 현대문학지를 보면 나옵니다. 송영이라는 작가도 이후 소설가로만 평가됐습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극작가중의 한 사람이었지요. 이 작가도 북에 가서 최고위직까지 올랐습니다만 우리 연극사에서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공연예술인들은 왜 북으로 갔을까? 북은 연극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마련돼 있어 공연예술인 3분의 2 이상이 올라갔다. 해방 이후 남조선에서는 모리배, 잡배들이 극장과 공연장을 정부로부터 분할받아 예술인들을 착취하면서 일제강점기보다 환경이 나빠졌으나, 북조선에서는 인민예술가, 공헌예술가로 우대하면서 국가정책적으로 장려했다.

"이 시기에 북으로 올라갔던 공연예술가들은 대략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 번째는 고향을 찾아 떠났던 예술가들입니다. '재북작가'라고 불리지요. 북한연극계의 '신화'로 남아있는 남궁만 선생이 이런 부류입니다. 두 번째는 출신은 남쪽이지만, 사회주의를 쫓아 북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신념을 쫓아 북으로 갔던 사람들이 공연예술계에서는 가장 많았습니다. 세 번째는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연극할 수 있는 무대를 찾아갔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생계형 월북 예술인이죠. 네 번째는 이도 저도 아닌 이유 때문에 간 사람들인데, 임선규 같은 작가가 그런 부류입니다. 그는 부인 문예봉 씨를 따라 북으로 잠시 갔다가 눌러앉았습니다. 당시 북으로 간 사람들은 대단한 예술인들이었습니다. 친일을 했어도 예술적으로는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죠. 그들의 작품 속에서 찬양의 대상이 됐던 '일제'를 '북조선'에 대입시키면 선전용으로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대다수 극작가들은 좌익을 통해 민족연극을 수립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상심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그들은 북으로 올라가서 더욱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북은 문화선전활동에 가장 영향력 있는 분야를 공연예술이라고 여겼고, 예술인들은 이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유실됐거나 잊혔던 극작가와 극작품들이 공개되면서 학문적 공정성을 상실했던 기존 연구의 관행을 타파할 계기가 마련됐다. 따라서 그동안 꾸준하게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대중극과 친일극에 대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며, 개별 극작품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새롭게 전개돼야 할 것이다.

이재명 교수는 "이념적 편향성을 제거한 채 개별 극작품에 대한 철저하고 공정한 연구가 이뤄져야 하며,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한 극작가의 여러 극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각 작가의 고유한 극작술도 연구돼야 한다"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