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우리 안의 친일문화

[친일미술] 김경승, 김인승 형제, 친일로 출세...해방이후 지도급 인사돼

이동권 2022. 8. 27. 15:39

인천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 ⓒwikipedia


(현재 인천 자유공원의 명칭을 만국평화공원으로 바꾸고 맥아더 동상을 옮기자는 여론이 들썩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예술은 황민화 정책, 경제수탈과 전시총동원체제를 위해 복무했다. 친일 미술인들도 이에 동참하여 붓과 망치를 들고 작품을 창조했다. 가장 뚜렷한 친일 예술로 지적됐던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분야에서도 그 족적은 여러 군데서 발견되고 있다.

조선 미술계에는 전통양식을 파괴하고 일본 화풍이 강요됐다. 미술이 일제의 식민지 선전교화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자연스럽게 후학들도 친일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더욱 심화됐다. 시국전람회와 종군 미술 양성을 통해 전시 파시즘을 육성했으며, 조선의 미술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근현대미술계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친일 미술인 김경승, 김은호, 김기창, 이상범 등은 해방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숨진 독립운동가들의 조각을 만들거나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로로 활동하면서 우리 역사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일제를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침략전쟁 동참을 독려했던 김경승과 김인승 형제 미술인의 행적을 살펴보면 당시 미술인들 삶의 유형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근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술인이 조각가 김경승과 서양화가 김인승이다. 친형제였던 이들은 '형제 미술인'으로 국내 미술계에서 유명세를 떨쳤으며, 일제 말부터 1980년대까지 미술계의 대부로 군림하면서 부와 명예를 축적한 친일 미술인이었다.

이들 형제는 해방 이후 한때 '친일미술'행적 때문에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기도 했지만 동경미술학교 출신과 경력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인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이끌어갔다.

김경승, 김인승 형제는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를 맡았다. 1941년 '회화봉공'을 다짐하며 탄생한 조선미술가협회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회장으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이다. 이 단체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 연락협의회를 구성해 전람회를 열고 수익금을 마련해 국방헌금을 바치기도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던 김경승은 추천작가로 선정된 뒤 조선 민중의 전쟁 협력을 부추기는 그림, 다섯 점을 출품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일제 말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또한 김경승은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는 "구라파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는 것"이라면서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김인승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전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성전하 미술보국 매진'을 이유로 만들어진 '단광회'에 가입하여 친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단광회는 조선, 일본 미술인 19명 만들었으며, 그 당시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구성된 최고 엘리트 미술인 단체였다.

해방 이후 김인승은 19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해서 국내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으며, 김경승도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평화통일자문위원을 지내면서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안중근 의사 등 순국애국열사의 동상을 제작하고 구상 조각계의 거목이 된다.

이들은 훗날 문화훈장과 함께 3.1 문화상을 나란히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