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미술평론가는 근대미술사학회의 부회장이자 미술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와 '한국근대미술 비평사' 등의 저자이자 친일인물사전 편찬위원이다. 그는 '교사가 음란물을 배포했다'는 죄목으로 김인규 선생을 체포한 경찰에 날카로운 공개질의서를 보내 미술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날카로운 필체로 근대미술사의 정곡을 훑어오고 있는 최열 평론가를 만나 친일 미술인들의 내적논리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았다.
"친일 미술인들 중에 지금까지 반성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작가 구본웅이 해방 직후에 반성문을 쓰긴 했지만, 당시 공개적으로 쓴 것도 아니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발견된 것일 뿐, 진정한 반성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친일 행위에 대해 지적을 하고 청산을 해야겠다고 하니까 반론하는 미술인도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하지 않았던 작가가 어디 있었냐고 주장합니다."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 17회 추천작가로 뽑힌 친일 미술인 김기창 화백은 자신의 친일 논란에 대해 "일제강점기에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으며,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근대 미술사에서 김기창 화백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작가다.)
하지만 최열 평론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오지호, 이인성 같은 대단한 작가들은 친일을 하지 않았다"면서 미술인들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의 부재를 나무랐다.
1911년 친일미술의 대표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이 회장으로 있었던 조선서화미술회였다.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운영됐으며, 서울 서화가들을 모아 결성한 조직이었다. 1915년 결성된 서화연구회에도 친일 매국노 김윤식이 깊이 관여했다. 초창기의 친일 미술인들은 친일파 관료와 총독부 아래 활동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최열 문화평론가는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에서 단체, 기관, 개인의 친일미술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1차 시기와 2차 시기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전반기인 1차 시기에는 친일 활동이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일제강점기 말기인 2차 시기에는 단순명료함이 특징이다는 것. 따라서 1차 시기에는 개인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내면에 숨어 있는 은밀성을 해명하는 방식이어야 하며 2차 시기에는 친일 참가 행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1922년 친일미술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조선미술전람회는 민중사상의 순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회 교화에 나섰다. 전람회 위원장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심사위원단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함께 뒀다. 당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 첫 공모전에서 조선서화미술회는 회원들의 작품을 대거 출품토록 해 총독부의 종속과 협력을 과시토록 했다.
그러나 1935년 조선인 심사 참여제도는 완전히 폐지되고 추천작가제를 도입했다. 2차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 말기에는 '협력'이라는 전술이 없더라도 '지배'가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최열 평론가가 지적했던 2차 시기의 '단순 명료함'과도 궤를 같이 한다.
1938년 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심사권한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심사 참여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참여한 작가가 김은호, 이상범이며, 추천작가는 김기창, 김인승, 이인성, 심형구였다. 이들은 해방 이후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저명 인사가 된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 식민통치기구의 하나로서 제국주의 미술정책의 실현이자 그 산물입니다. 하지만 일제는 일제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정책의 방향을 심미주의 미학과 지역 향토색을 장려하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정치성을 배제하면서 대동아공영 문화권을 겨냥하는 문화제국주의의 관철을 위한 장으로 설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참가했던 식민지 미술인들은 복잡한 층위가 형성될 여지가 큽니다. 따라서 조선미전을 무대로 하는 활동을 일괄하여 친일미술 행위로 해석하는 태도는 그 성격을 단순 재단하는 것입니다. 조선미전에 응모했다거나, 입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또는 무감사나 추천, 참여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일제부역행위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는 근본주의 관점으로 다층화된 세계를 부정하는 극단의 태도입니다. 다만 개인의 활동을 판단, 평가함에 있어 방증 자료라는 점, 그리고 제국의 통치 지배 기구라는 본질을 지닌 기구라는 점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1927년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조직한 조선동양화가협회 따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민족을 배반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일제강점기 시대의 미술인들은 왜 친일을 했을까? 이에 대해 최열 평론가는 조선 미술인들의 친일 내적논리는 아주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자신들의 출세지향적인 욕구가 역사의식이나 시대정신과 일치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친일로 빠졌습니다. 대표적인 친일미술인은 가미가제 비행사였던 총독 아들의 흉상 '아베소위상'을 만든 윤효중입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일제강점기 신궁 자리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쓰러졌다. 1957년 8월 당시 돈 3억 원을 들여 만든 이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해서 조각가 윤호중이 만든 것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동족상잔의 상처에 시름하던 국민들에게 미술의 위력을 인식시켰던 충무공 이순신 동상도 제작한 바 있으며, 이후 각종 단체와 예술원 등의 실권을 차지하면서 한국 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윤효중은 1948년 홍익대학교에 미술과가 생기면서부터 관여하기 시작해 1954년 미술학부장이 됐다. 그뒤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과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 '미술대학은 홍익대학교'라는 전통을 만들어온 장본인이다.
최열 평론가는 윤호중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작가로 "금비녀를 일제에 바치는 작품 '금채봉납도'를 그린 김은호와 친일미술가단체인 '단광회'에서 활동했던 한국 작가들 중 김인승을 꼽았다.
김인승은 비행기를 헌납하는 작품을 만들었으며 육군미술협회 주최로 일본에서 개최된 제36회 육군기념일 육군미술전람회 유기헌납도를 출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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