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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미술] <인터뷰> 김민수 서울미대 교수 - 반민특위 처단이 사회 부조리의 서곡

이동권 2022. 8. 26. 21:15

김민수 교수&nbsp;&copy;서울대학교

서울미대 김민수 교수가 거쳐 온 험난한 여정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친일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여파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김 교수는 지난 199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공예교육 50년사'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서울미대 초장기 원로교수 장발, 노수현, 장우성을 친일미술가로 인용 언급했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학장실에 불려 가 4시간 동안 이 부분을 '삭제하라'는 협박과 회유를 당했으며, 심지어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의 단초가 된 '연구실적심사보고서'도 또한 이 문제와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그는 1998년 8월 31일 서울대 교수 재임용심사에서 재임용 심사요건을 충족시키고도 탈락하고 말았다.

"친일청산을 얘기하면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하느냐', '이제 와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에 대해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친일 과거사 청산은 민족주의적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온갖 부조리의 뿌리로서 '질병의 원인치료’ 차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김민수 교수는 해방공간에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세력에 의해 처단되었던 역설의 역사가 사회 부조리의 서곡이었다고 본다. 미술계 역시 해방 직후 친일미술가들이 단죄되지 못하고 되레 화단과 교육계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회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역사문제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미래를 담보한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와 시각문화 내의 친일미술과 일제잔재가 청산돼야 합니다."

김민수 교수는 서울대에게 해직된 뒤 복직투쟁이라는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학자적 자존심과 신념을 한 번도 꺽지 않았다. 마침내 김 교수는 2005년 1월 '연구실적물에 대한 심사와 관련하여 심사대상의 선정방법에 잘못이 있다고 보이고, 심사결과의 평가에 있어서도 심사기준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용을 거부한 것은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하거나 남용한 것으로 위법하다’는 법원의 최종 판결로 2005년 서울미대 교수로 원직복직됐다.

"프랑스는 파리 해방 후 당시 전국미술가연맹 회장이었던 파블로 피카소가 반역자 숙청재판에 회부해야 할 미술인 명단을 파리 경시청과 검찰에 전달했습니다. 이때 블랙리스트에는 오통 프리즈, 폴 벨몽도, 폴 랑도프스키 등의 유명 미술인들이 포함돼 있었지요. 숙청위원회가 주목한 화가들 중에는 점령 기간 중에 독일여행을 하면서 나치협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 화가와 화상들도 다수 포함되었을 만큼 단호하게 진행됐습니다. 이 결과 1946년 6월 미술가 23명을 친나치부역미술가로 낙인찍음으로써 숙청이 마무리됐습니다. 그 당시 드골 대통령이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惡)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는 '프랑스에는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한국은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한국문화에서는 거장이 죽으면 작품도 함께 잊힙니다."

친일미술과 일제잔재에 대한 청산은 극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류 사회의 진출과 출세를 위해서는 묵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여는 것은 김 교수가 처했던 지난 고통의 세월처럼 미술계의 '왕따'로 전락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83년 '계간미술’ 봄호에 자신의 이름을 차마 밝히지 못한 9명의 필자가 공동 이름으로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비평문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친일 미술인이었던 월전 장우성과 운보 김기창 화백 등은 일간지 광고지면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계간미술’ 발행인이었던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사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언론이나 잡지에 필자 9명의 글은 청탁하지도 말라고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9인은 김윤수, 문명대, 박용숙, 안휘준, 이경성, 이구열, 임종국, 정양모, 최순우였다.

"그 당시는 친일 미술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무섭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아쉽게도 그동안 미술계에서는 친일미술의 용어와 개념조차 합의된 적이 없을 만큼 그 엄혹한 시대의 논리가 진행되었습니다. 때문에 명백한 사료를 눈앞에 두고도 친일미술가를 규정하는데 늘 논란이 됐고 친일미술을 '일제잔재' 혹은 '식민잔재'라는 말과 뒤섞어 사용하며, 어떤 이들은 특정 양식과 주제만의 문제인양 '감각과 기법차원에서 논의하자'고 초점을 흐리게 했습니다. 이 결과 청산해야 할 친일미술의 쓰레기 더미가 거대하게 쌓여만 갔습니다."

김민수 교수는 한국 미술계에서 친일 청산이 되지 않은 원인에 두 가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첫째는 청산을 가로막는 친일미술인들과 그 후예들이 용어의 초점을 계속 흐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문화예술계처럼 미술계 역시 친일세력이 해방공간에서 지배구조의 기득권을 장악했습니다. 곧이어 친일미술을 은폐하기 위해 독버섯들이 피기 시작한 것이죠. 둘째는 친일미술이 '일제잔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유전자가 복제되어 일상 삶과 시각문화를 지배할 만큼 자가증식했다는 점입니다. 은폐된 친일미술은 일제잔재의 형태로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정신과 철학이 부재한 이 복제과정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후진양성과 시각문화를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빈껍데기 문화보다도 더 큰 폐해는 일제잔재의 형태로 남겨진 미술가들의 반사회 기회주의적인 삶의 가치관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주류 미술가들이 '순수미술'의 미명 하에 현실문제와 무관한 삶을 살고, 일제에 화필보국한 이유입니다. 독재권력에 아부해 미술을 환경치장술로 격하시키고, 심지어 친일했던 마음과 손으로 백범, 안중근, 유관순, 논개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동상과 영정을 도맡아 제작해 민족정기를 능욕했습니다."

용어마저도 생경한 미술계에서의 친일미술과 일제잔재란 무엇일까. 김민수 교수에 따르면 이렇다.

친일미술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제의 침략주의와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시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미술단체와 시책 선전을 위한 미술품 제작, 저작 및 교화했던 했던 친일부역행위의 적극성, 반복성, 자발성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는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에 단순히 붓을 들었다고 모두가 친일미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반복해서’ 부역행위에 앞장섰던 미술가만을 친일미술가로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일제잔재란 청산되지 않은 친일 미술의 결과물이 한국 미술계에 남겨준 산물로서, 친일 미술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친일 미술의 싹을 가지고 있는 미술계의 제도적 습성, 미학적 태도, 형식과 기법 등을 총망라한 것이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한국은행이 최근 화폐를 교체한다면서 대표적인 친일미술가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초상화나 천 원권의 현초 이유태가 그린 퇴계 이황 그림을 교체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들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화폐속의 역사인물들을 일본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기여했던 주요 인물로 모델로 삼았는데, 화폐 속 인물의 묘사가 사진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적 신뢰감을 전달하죠. 예컨대 중국 위안화의 경우, 마오쩌둥과 소수민족의 인물들을 실제 사진이미지에 기초했기 때문에 사실성을 높였고, 일본의 만 엔권엔 19세기 말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계몽가이자 게이오의숙 설립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 오천 엔권엔 19세기 말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천 엔권엔 근대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사진과 같은 그림이 들어있죠. 중국과 일본의 이 화폐들은 화폐가 지니는 국가적 상징성을 담아낸 역사적 인물들을 화폐에 담았고, 그 표현도 신뢰감이 생기게끔 사실성이 뛰어납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신뢰감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표적인 친일화가가 영정을 그려 화폐의 상징성을 훼손시키고, 우습게도 자신의 얼굴을 심하게 그려 넣은 천 원권의 퇴계 이황 그림의 코미디도 있죠. 학맥 인맥 중심의 미술계는 자신의 이익만을 집단적으로 보호하는 파벌형성에 주력한 못된 전통을 세습시켰습니다. 이는 천황제 가족주의 파시즘으로부터 학습한 일제잔재 때문입니다. 이때 '순수'미술이란 온갖 속세의 죄를 스스로 씻기 위한 '면죄부'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합니다. 미술계에서의 친일문제는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기에 온갖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입니다. 이런 업보로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는 '친일미술'과 '일제잔재'를, 병원으로 치면, 두 개의 수술방에서 동시에 치료해야만 하는 이중의 업보가 남겨져 있습니다. 친일미술이라는 근본적인 종양을 제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잔재로 생긴 여러 합병증을 입체적으로 치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