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가 해방 이전 국내 음악계의 대부였다면, 그의 뒤를 이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양악계의 거물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현제명이다. 그는 국내의 유명 음악 단체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아왔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으로서 국내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현제명은 역사적으로 가장 친일 행적이 뚜렷한 '친일 음악가'였다.
노동은 중앙대학교 교수는 "현제명은 홍난파와 함께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 총독부의 관제 친일단체에서 지도자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면서 그가 가장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교롭게도 친일 전력의 음악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 출신이거나 일본유학파였고, 홍난파와 함께 현제명 역시 극소수의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배경은 해방 후 음악계가 기독교-친일-친미-반공 이데올로기로 사상을 제한시키는데 공헌했다"고 밝혔다.
현제명은 친일의 선봉에서 서서 국민개창운동 지도자,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고려교향악단 창설자 등으로 활동했다.
노동은 교수는 '민족개량운동'을 주장한다. 친일로 들어선 조선 음악인들이 국내 양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민족개량운동을 주도했고 그것이 친일 음악으로 이어지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민족개량운동'의 주역으로서 음악인 현제명이 뚜렷한 친일 활동을 했음"을 지적하면서, "해방 이후 역사적 반성 없이 현제명이 악단의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하여,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의 대상이지 윤리적,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님을 정당화시키는 병리적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민족개량운동'이라는 정확한 명칭은 없지만, 노 교수의 얘기처럼 조선 음악인들은 민족음악을 발전시킨다는 논리로 일제에 협력하여 개인의 음악활동을 보장받았다"고 동조했다.
아울러 "국악은 규왕직아악부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체제 안에서 활동했고, 양악은 이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과정에서 음악인들이 낙후한 음악환경과 교육을 개량하기 위해 일제에 맞춰나가다 변질된 것"이라면서 "당시 음악인들의 계급성이 일제의 통치제제를 뚫고 나가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음악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친일을 선택해야 했다"고 진단했다.
노동은 교수는 이에 더하여 "현제명은 세태에 끌려서 친일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친일의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활동했다"고 꼬집었다. 즉 홍난파가 작성한 성명서처럼 현제명도 "일본의 대 국가적 사명의 수행, 아시아 제 민족을 백인제압의 질곡에서 해방하려는 목적"을 관철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제명은 1938년 "민족관, 국가관, 세계관을 깨끗이 청산하고 적화공산의 참화와 개인주의, 공리주의적인 백인 문명의 추악에 염증이 나므로 팔굉일우의 일본정신으로 세계 인류를 지도할 원리로 삼을 것"주장하면서 "일본정신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가지고 이와 같은 새로운 신념으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바 있다.
현제명은 민족개량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의 친일 행위는 무엇일까? 노동은 교수는 '순수 음악계의 일본국민음악 수립운동'제하의 논문에서 그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밝혔다.
노 교수는 "현제명은 1937년 홍난파, 김영환, 이종태, 함화진 등과 함께 '조선문예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개량운동'을 주창했으며, 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조선문예회는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교화 단체로서 회장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타카키가 맡고 있는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였다.
그러나 "현제명은 수양동우회 단우였기 때문에 일제가 전시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상탄압으로 검거됐지만, 일제 관제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 회원 자격으로 홍난파와 함께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의 종교보국논리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려는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담긴 사상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 친일 행위를 본격화하게 됐다"면서 "이후 홍난파는 조선문예회에 복귀하여 음악활동을 했고 현제명은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인솔 하에 군 위문공연을 시작하면서 친일 음악인의 길을 확고히 했다"고 진단했다.
결과적으로 "친일 음악인들은 '조선 음악인이 조선인들을 계몽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 지배층과 손을 잡았고 이로부터 자신들의 음악 발표와 악보제작, 음반 취입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밝히면서 "이것이 바로 민족개량운동의 선두에 있는 친일음악인들의 논리 "라고 꼬집었다.
현제명은 1941년 난파 홍영후의 죽음으로 조선 최고의 친일 음악인이자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선다. 노동은 교수에 따르면 그 정점에 경성후생실내악단 제2기 이사장과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현제명이 취임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은 1942년 전시에 조선 민중들의 정신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결성된 악단이다. 이들은 현제명의 지휘 아래 광산이나 공장 등 병참 기지가 된 조선의 생산 지역 노동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며 침략전쟁의 동참을 독려해 '조선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아베가 회장으로 있던 조선 음악협회에 이사로 들어간 현제명은 국가 봉납식을 통해 황국 신민으로서 음악 보국을 맹세하고 시가 행진을 했으며, '기예자 증명서'발부를 기회로 민족 음악가 숙청 사업을 진행했다. 현제명은 또 일본국민음악 보급으로 전시 체제를 갖추는 사업을 진행하는 등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친일 행위에 앞장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제명은 해방 직후 제일 먼저 고려교향악협회와 그 산하에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미군정 장관을 명예 회장으로 영입했다. 또 한국 민주당 문예의원,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초대 음악학부장 등을 맡으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일제에 굴복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미군정에 머리를 숙여,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 민족음악인이자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만약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어떠했을까. 적어도 홍난파와 현제명이 민족음악인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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