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친일 음악인이라고 불리는 조선 음악인들은 한국 음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발표되기 전 이들은 발전된 국내 음악계를 선도한 자랑스러운 선구자로 칭송됐으며, 일제강점기의 핍박을 넘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던 애국지사로 일컬어졌다.
하지만 친일인명사전은 현대 음악을 개척한 두 영웅 난파 홍영후(모리카와 준)와 현제명(쿠로야마 사이민)에게 친일 음악인이라고 선고했다. 이들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와 황도 선양의 기치 아래 황국화 사상보국운동에 동참하고 친일 논리를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부 음악인들은 "홍난파는 망국의 한을 부르짖는 심정에서 우리 민족의 처지를 봉선화로 비유한 우리나라 최초 예술가곡 '봉선화'를 애통한 가락으로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랬다"면서 "비록 선구자들 중에 그들이 음악을 통해 우리 국민들에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고취시키며 그 일제의 어여운 때 희망을 잃지 않고 참아내게 한 그 애국정신은 그 몇 백배의 공적"이라고 말했다.
또 홍난파의 미망인 이대형 여사는 "난파 선생이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히고 그 돈으로 독립선언문 수 천매를 인쇄해서 배포했고, 그 일로 일본 독립운동가로 낙인찍혀 감시를 피해 귀국하여 은둔했으며, 도미해서는 흥사단가를 작곡하고, 이 일로 종로경찰서, 대국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러 지병 늑막염을 얻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위 주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볼 점도 있지만, 역사를 조금이나마 공부한 사람이라면 위 사실이 인정될 수 없는 일부 증언에 의해 증폭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난파 홍영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이들로부터 왜곡이 시작되고, 신화로 만들어져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가 친일 음악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에 대해 논증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한다"고 말했다.
사실 홍난파는 조선 국민들에게 대동아건설을 목표로 일본 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을 펼치자는 논리로 친일창작활동을 벌이고 언론활동과 악단활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황도 정신을 설파하는 사도를 자처했으며, 조선 총독부의 각종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방송에 출연해 군국가요의 창작과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런 홍난파의 친일 행위에 대해 차치해 두고서라도 난파 홍영후의 친일 행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거짓된 진실의 실체는 무엇일까.
봉선화=봉선화는 1920년 4월 28일 가사 없이 기악곡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시인 김정후가 이 곡에 가사를 붙여 널리 알려진 노래가 봉선화이다. 봉선화는 1926년 4월 25일 등사본으로 발간된 세계명작가곡선집에 처음 수록됐으며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이용창 연구원은 "봉선화가 금지곡이었으며 일제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일제가 철저하게 음악 행위 활동을 통제하던 중에 1942년 특별판으로 제작된 레코드에 봉선화가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홍난파가 민족의 한을 달래주었다는 것에 의문"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역사적인 사실처럼 꾸며졌다는 것이다.
늑막염=일제의 고문에 의해 늑막염을 앓고 죽게 됐다는 난파 홍영후. 하지만 그는 미국 유학시절 늑막염으로 고생했으며 1934년 잡지 '신가정'에 회고한 그의 글에서도 줄곧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고 적혀있다.
이용창 연구원은 "수양동우회 사건 훨씬 이전부터 늑막염으로 고생했고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병이 재발하여 귀국 직후 후유증으로 죽을 고비까지 경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거짓임을 밝혔다.
흥사단가=유족과 음악인들은 미국 유학시절 흥사단가를 작곡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용창 연구원은 "흥사단가는 도산 안창호의 가사에 김세형 씨가 작곡한 곡"이라면서 "이는 작곡가 본인이 직접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유족들은 난파가 6월 11일 검거됐다가 8월 21일 송치 석방됐다고 하는데, 그 기간 중 홍난파는 7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소년'에 '성공의 길-음악가가 되려면'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어 7월 중에는 일본 빅토어 축음기 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을 사임하는 등의 행적이 파악되고 있다"면서 "난파가 이 기간 동안 송치 또는 석방되고, 대구 형무소까지 끌려갔다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누구에 의해 신화가 만들어졌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 난파 홍영후가 민족 음악가라는 반박의 연구와 자료가 제시돼 왔다. 이로써 경기도 화성시에서 추진하고 있던 기념사업회도 잠정적으로 중지된 바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중반, 민족문제연구소는 난파 홍영후 음악제를 이끌어 왔던 한 지역의 음악 단체로부터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공동연구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난파홍영후연보공동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함께 연구 집필 단계에 들어가서 2005년 말에 홍난파 연보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자료를 보면 홍난파의 친일 행각과 민족 음악가로서의 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처음 논의단계부터 연구위원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외부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들의 시각과 판단에서 평가하도록 했다"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지연된 것은 두 단체가 이러한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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