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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영화] <인터뷰> 강성률 영화평론가 - '조선영화령'에 자발적으로 동조했던 영화인

이동권 2022. 8. 26. 18:31

강성률 영화평론가를 만나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인들의 친일통제정책 옹호논리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았다. 강 평론가는 광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영화 부문을 맡았다.

"일제는 조선 영화를 '강제'했지만, 당시 영화인들은 일제의 영화 통제 정책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영화 통제 정책인 '조선영화령' 시행에 따라 얻게 되는 이익을 뿌리칠 수 없었죠. 일제의 억압에 의해 협조한 면도 있지만, 눈앞의 이익 때문에 주판알을 튕긴 것입니다. 조선 영화인들은 배급사와 제작사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서 민족말살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영화사가 대기업화돼 생활의 안정을 찾고, 영화인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화려한 유혹에 눈이 멀고 말았죠. 일제의 영화 통제는 미군정기와 유신체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절로 영화사 허가제와 사전 검열이라는 뿌리가 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한 번 통제를 당하면 다른 시기에도 저항보다는 비슷한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맙니다."

일제의 조선영화 지배정책은 1937년 만주영화법이 통과되면서 적극적인 양상으로 돌아섰다. 이전에는 영화검열을 통한 소극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만주국의 영화를 통폐합하고 1939년 일본영화령을 공포하면서 조선 영화 통제에 나선 것이다. 그 뒤에는 조선의 영화 통제가 시작됐다.

"'조선영화령'이 선포된 뒤 일제는 조선영화인협회를 통해 1940년 10월부터 영화인 등록을 받고 심사해서 기능증을 주는 '기능심사위원회'를 운영했습니다. 기능증명서가 없으면 영화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인 등록에서 중요한 것은 기능이 아니라 사상적 검사, 즉 신원조사였습니다.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영화령' 외곽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는 일제가 완벽한 조선영화 통제체제를 구축하자 1942년 10월 해산됐습니다."

조선영화인협회를 결성하고 통제체제의 발판을 마련한 일제는 1940년 조선영화령을 공포한다. 영화령의 주요 내용에는 영화 사업 등록제, 외국영화 수입 제한, 문화영화 강제 상영, 대본 사전검열, 영화사업과 종업자 등록제 등이 있다.

"조선영화령을 공포 후 일제는 조선영화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배급과 제작을 일원화했습니다. 일제는 1942년 4월 조선영화배급회사 업무를 개시하면서 5월부터 전국 극장을 홍, 백 두 개의 계통으로 나누어 새로운 배급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일제는 또 1942년 9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창설하면서 기존의 영화사인 조선영화주식회사, 고려영화주식회사, 한양영화주식회사, 경성영화촬영소, 경성발성영화제작소, 명보영화사, 조선예흥사 등 일곱 개 영화사를 양도하는 형식으로 축출합니다."

안정적으로 영화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본력이 뒷받침되는 회사가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자금력과 설비를 갖춘 영화사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결국 국가가 나서서 군소 영화사를 통합하여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일제는 영화인들의 이런 마음을 이용해 '조선영화령'을 공포하고 조선 영화 통제체제를 갖춘다. 그 당시 영화인들이 왜 조선영화령에 자발적으로 순응했을까?

"영화산업의 안정화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 영화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영화 선진국들처럼 안정적인 자본과 기술이 있는 대기업에서 안정적으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체제를 옹호했던 영화인들은 대부분 기업화를 원했습니다. 일본이나 할리우드처럼 탄탄한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일제의 영화 통제를 용인했던 대부분이 이런 논리였죠. 민족영화인으로 알려진 이규환도 신체제가 구축되면 무질서한 기존의 조선영화계가 쇄신해서 조직적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국가가 제작을 지도 통제해서 혼란상을 막아주고, 영화인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등록을 필한 사람이 영화를 만들고, 그런 영화인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었으니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였지요."

그랬다. 일제강점기 '아리랑'과 함께 쌍벽을 이뤘던 '임자 없는 나룻배'의 이규환은 민족영화인이 아니라 친일 영화인이었다. 그가 말한 국가는 일제였으며 그가 말한 영화인은 영화 통제에 옹호했던 친일 영화인들이었다.

"조선영화령이 실시되면 영화인의 생활이 안정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거대 자본이 조선영화계에 들어와 최신 기술과 좋은 세트에서 촬영을 할 뿐 아니라 생활문제도 해결해주기 때문이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창립되기 전 영화인들의 생활은 비참한 수준이었거든요."

조선영화제주식회사가 만들어지면서부터 배우, 감독, 기술자에게 정식으로 계약을 해서 개런티를 책정했다. 그전까지는 이런 규정은 전혀 없었다.

"영화령 실시로 영화인 등록을 하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고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영화인 회원증 소지자는 만원 기차라도 당국에서 우선 승차시켜 줄 정도였습니다. 영화인 등록은 신인의 진출을 막아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켜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고, 게다가 조선 영화인으로 등록하면 해외에도 영화인으로 등록 진출할 수 있는 독점권이 있었습니다. 당시 영화인들은 조선영화령이 시행되면 미국 영화의 점유를 막고 해외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실제 미국 배급협회의 자료를 보면 할리우드 영화가 조선 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영화령이 실시되면 영화인들에게 조선 영화가 기업화되고, 생활이 안정되며, 기득권이 유지되고, 해외 시장까지 개척하게 되어 영화인들에게는 희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