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민중은 생산의 주체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 생산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는 스스로 건강하고 진보적인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활력과 기쁨을 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러나 자본의 성장은 피생산자들에게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고,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자들만 누리는 문화로 전락하면서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는 보수적인 교육과 언론에 의해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유포됐으며, 대중의 관심을 굴종의 삶으로 이끌었다.
민중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민중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생겨난 일이었다. 또 제도권의 상업적 대중문화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반민중적인지 인식하면서 민중의 삶과 목소리를 담은 문화가 필요함을 점점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민중문화는 대학 풍물패나 탈패의 전통 위에서, 사회변혁의 투쟁 위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민족의 운명, 통일운동의 사명,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 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의 삶과 투쟁의 현장에서 향유되면서 민중을 지향하는 문화로 위상을 정립했다. 그중에서 '노동가요'는 노동자들의 삶과 현장의 정신을 수행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며 새로운 음악 장르로 인정받았다. 그 주축에 노동자노래단(노노단)이 있었다.
1987년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들의 가열찬 투쟁은 학생과 지식인 중심의 운동을 노동자 중심으로 바꿨으며, 노래운동에서도 또한 노동자들을 중심에 서게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사회 변혁의 주체로 자신을 인식하면서, 투쟁의 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노동자의 노래를 요구하게 됐다. 이런 역류의 전초엔 노노단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연스럽게 노동가요라는 장르를 만들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노동이라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담아냈던 노노단은 자연스럽게 노동가요의 모태가 됐습니다. 한 번 들어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대중성 있는 곡을 추구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죠. 그 당시 민중문화운동단체인 민문연은 노동자들의 정서와 맞지 않은 점이 많았습니다. 음악도 매우 어려웠고요. 그래서 노노단은 쉽게 배우고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동가요를 만드는 것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노동운동의 응집뿐만 아니라 노동가요라는 장르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노노단은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소극적이기만 했던 노래운동의 취약점을 극복하는 것과 함께 노동자들의 삶이 담긴 노래를 창작하고 보급하기 위해 태동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구로, 인천, 울산 등 전국에서 노동자 노래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시기였다.
"학출들이 현장에서 대거 이동했습니다.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을 책임지지 않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에 힘을 줄 수 있는 문예운동이 필요했습니다.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조직이요.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해고자 출신이었던 김애영, 김호철 씨의 견인이 컸습니다. 노노단이 만들어지기 전, 처음 엄인희 씨가 대표로 있었던 안양문화운동연합, 민족음악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던 민중음악가들이 모여 신촌에 있는 한마당극장에서 여성노동한마당을 열었습니다. 이 공연은 문예운동의 큰 반향을 일으킬 만큼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지요. 이 공연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느끼게 됐고, 그에 따른 조직과 단체가 필요하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민요연구회에 있던 김애영 씨와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던 김호철 씨,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천미예 씨와 제가 모여 노동자노래단을 결성하게 됐습니다."
노노단은 안양문화운동연합과 함께 1집 '총파업가' 앨범을 제작한다.
"첫 음반 '총파업가'는 중앙대학교 방송실에서 녹음했습니다. 달리 녹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카세트테이프를 이용했지요. 요즘은 사운드 편집기술이 발달해서 짜깁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는 테이프에 녹음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물론 음질도 무척 안 좋았고요. 하지만 그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노동가요라는 음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넘쳐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매일 날을 새며 수공업으로 음반을 찍어내야 했지요. 이때는 정말 열의에 가득 찼습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점점 거세어지는 반면 투쟁에 대한 믿음과 의지, 결의는 정말 투철해져만 갔던 것이죠."
노노단은 2집 '전노협진군가'를 발표한다. 이때부터가 노노단이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음반을 만들었던 시기다.
"1집 음반은 카세트로 녹음을 했지만, 2집은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습니다. 노노단에 대한 호응이 좋아서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뽑기도 했고요. 그때부터 노노단에서 활동했던 단원은 10명을 넘어섰습니다. 후에 김성민, 윤민석 씨 등이 가세해서 3집 '노동자행진곡'과 4집 '민중연대 전선으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전노협 결성으로 자본의 물리적인 탄압이 더욱 거세진다. 이때 노노단은 파업현장과 집회 등 현장 투쟁에 참여하면서 노래만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데 집중한다.
1991년 들어서는 민중권력쟁취가의 노랫말 '구속수배에 백골단 폭력에 육해공군 상륙작전 전쟁선포'처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골리앗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점점 그 힘을 잃고 대중운동 침체기를 맞는다.
"노노단은 전노협 출범과 함께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 시기에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거든요. 이에 질세라 노노단은 현장투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노동자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해방 후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조직한 집회에 민족예술동맹이 참여해 노래했던 상황과 매우 비슷했지요."
전평은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노동단체로 조선민주청년동맹과 더불어 남조선노동당의 양대세력이었으며, 무산계급의 해방을 외치며 창립했던 단체다.
이후 노노단은 노래패 예울림과 함께 대중적이고 전문적인 음악으로 노동자들의 일상공간에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에 동감하고 새로운 노래패 '꽃다지'를 출범하게 된다. 꽃다지는 노노단과 예울림의 합동공연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땅, 아름다운 노래'를 발판으로 만들어진 연합노래패다.
80년대 후반, 노래운동의 양맥에는 '예울림'이 있었다. 예울림은 대학노래패 출신이 만든 단체로 1집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발표하며 정식 연행단체가 된다. 이때까지 예울림은 창작보다는 검증된 노래를 공연하는 노래패였으나, 2집 '출정전야'를 발매하면서 창작단으로 탈바꿈하고 수많은 파업현장과 집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노노단은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을 찾거나, 개인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백기완 선생님 대선에서 문화선전활동을 했고요. 노동가요는 악이 받치거나 분노에 차서 싸울 때 부르는 투쟁가요와 노동자의 서글픈 삶을 그대로 담아낸 서정가요로 나뉩니다. 처음 민중가요는 투쟁가요의 성격이 강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서정성 있는 음악으로 변해갔지요."
자본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노동운동은 점차적으로 서정성을 띄게 된다. 그로 인해 자신을 성찰하고 동지의 힘을 북돋아줄 수 있는 창작곡들이 발표되기 시작했으며, 집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인기를 끌게 된다. 이때 발표된 노래들이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민들레처럼' 등이 있다.
"최선을 다해서 동지를 만나고 동지를 위해서 목이 찢어져라 노래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죠. 하지만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합니다. 저는 별도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한때 잠시 예울림 선배님의 권유로 CM송 가수를 했는데, 그 시기에 공부에 대한 갈증을 많이 풀어냈지요. 현장에서 배우지 못한 음악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성악가 임호균 선생님, 문호근 선생님도 만나서 노래수업을 받았고요. 제도권에서 배웠던 전문적인 지식을 현장에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노래운동도 예술성과 전문성이 필요하거든요. 운동도 과학적 사고가 필요하듯, 음악도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가수 류금신씨는 노노단 시절, 문예일꾼으로 노동현장에 참여했던 정신을 이어받아 비정규직 철폐운동에 혼신의 힘을 경주했다.
"요즘은 비정규직,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공돌이, 공순이라고 천대받는 노동자들을, 이제는 국가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됐지만, 아직도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이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녀가 비정규직철폐운동에 전력을 다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2003년 10월 26일 첫 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철폐연대가를 발표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후 무대에서 내려와 대오 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플랑카드 같은 것에 불꽃이 튀기더군요. 자세히 봤더니,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동조합 전 광주지역본부장 이용석 씨가 분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이 맺혔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눈물이 납니다. 정말 노래 한마디 한마디가 사연이고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별받지 않은 세상을 위해 비정규직이나 장애인 운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죽이는 세상과 맞서고 싶습니다. 서로 더불어 잘 사는 게 좋잖아요."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과 맑은 미소는 내 마음에 '민중이 주인 되는 그날'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녀가 발표한 1집 앨범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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