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굵고 이지적인 무대를 이끌어왔던 피아니스트 임미정 한세대 교수가 국내 최초로 평양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다. 2005년 일이다. 그러나 임 교수는 이런 표현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측 언론들은 평양에서 공연하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긴다는 게 그녀의 불만이었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 분명하고, 한 민족으로서 평양 공연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전국순회독주회'는 남측에서의 공연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도 '전국'이라는 의미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것입니다. 남북음악교류재단의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미약하나마 새로운 남북교류의 씨앗을 뿌릴 수 있어 자부심을 느낍니다. 평양공연은 다른 음악인들에게 남북음악교류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음악교류재단은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의 상처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갈등을 음악을 통해 풀어보고자 창립된 단체다. 남북 음악인들이 공동의 노력을 통해 문화적 동질감을 회복하고, 자주통일의 기반을 만들어나가는 일꾼이 되자는 큰 뜻이 담겨 있다. 재단은 남북음악교류의 일환으로 북측에 피리 보내기 등을 벌이기도 했으며, 서울역에서 도라산역까지 운행하는 기차에서 '통일열차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임미정 교수는 남북음악교류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임미정 교수는 1997년 미국 텍사스 산 안토니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음악성과 뛰어난 테크닉을 갖췄으며, 음악의 중심을 끌어낼 줄 알고 내면의 소리로 청중과 대화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으며 우승했다. 또 에이버리 피셔홀에서 아메리칸 로열 심포니와 협연했고, 국내에서 펼쳐지는 육영, 삼익, 동아 음악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했으며, UN 50개국 지도자 정상회담을 기념하는 남북화합대음악회에 초청되어 북측 작곡가 윤충남 씨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음악은 인간이 서로의 영혼을 나눌 수 매개체입니다. 음악은 남과 북의 교류를 위한 소통의 도구로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토벤이 음악을 통해 얘기하려는 것도 이런 것입니다. 예술은 불멸합니다. 음악이 자주통일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의미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음악에는 비무장지대가 없습니다. 남과 북이 어디에서든지 만나 자연스럽게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양음악이라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유산으로 음악을 받아들이면서 현재 음악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음악은 고상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음악은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삶의 터전이 변하고 시대의 가치가 달라지더라도 음악은 변치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것입니다."
한 그루 나무에서 자란 가지와 잎의 모양이 모두 다르더라도 하나의 뿌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음악도 그렇고 남과 북도 그렇다. 정말.
임미정 교수는 2005년 11월 18일 평양 윤이상기념관에서 전국순회독주회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사실 임 교슈는 2000년부터 평양에서 열린 국제친선음악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이 음악제에서 그녀는 조선국립교향악단, 윤이상교향악단 등과 협연하면서 북측과의 음악교류를 꾸준히 이어왔다.
피아니스트 임미정 교수가 남북음악교류에 발 벗고 나서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줄리어드 음대 유학시절의 경험 때문입니다. 원로 음악가 안용구 선생의 권유로 미국 10대 도시를 돌면서 북의 가곡을 연주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위한 콘서트에 참가하면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월북 음악인들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처음으로 듣게 된 곡이었는데, 전혀 낯설지가 않았지요. 특히, 김순남 선생의 곡 '진달래꽃'과 '산유화'는 정말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평양초청독주회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2003년 협연에서 북측에 독주회를 열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북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수락하게 됐지요. 나 하나라도 민간교류에 나서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임미정 교수는 국제교류센터에 있는 윤이상기념관에서 연주하겠다고 자청했다. 500여 석 정도의 무대가 아담하고 편해서 좋다는 이유였다. 아울러 임 교수는 연주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새 피아노를 들고 평양에 갔다. 새로 짓고 있는 평양음악대학에 기증도 할 겸 해서다.
"조선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하는 순간 남과 북이 하나가 됐다는 마음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또 북연주자와 남연주자가 처음 만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해 봤는데도, 아주 잘 맞아 그 기쁨이 배가 됐지요."
보통 남측 사람들은 '북측 사람들은 클래식을 잘 모른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클래식은 대중들이 즐길 수 없는 고급문화인데다가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에 북측 사람들은 클래식에 아예 무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북측의 클래식은 남측보다 훨씬 대중화됐고 수준이 높으며 그 영역 또한 넓다.
"북의 클래식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음악이 50%, 창작곡이 50%를 차지합니다. 북에서는 창작곡을 '우리곡'이라고 부르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아리랑, 돈돌라리, 백두산의 눈보라, 눈이 내리네 등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선율을 클래식화한 것이어서 매우 쉽죠. 남측에서는 클래식을 어렵다고만 하는데, 북에서는 창작곡이 많고 쉽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거부감이 없습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한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씀처럼 처음 듣는 북의 클래식 곡은 대부분 귀에 익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학문적인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것이 음악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것이고 진보적입니다. 이런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할 수 있죠.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것이 음악의 발전을 이끌지만, 대중들이 듣기에는 어렵고, 대중들이 듣기 쉬운 음악은 과거의 권위주의에 머물고 있고요. 북측의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학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민족의 정서를 클래식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나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을 창작하려는 시도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북측 연주자들은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국가 행사도 많고 TV에서 방송되는 것을 자주 접하기 때문에 주민들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북측 교향악단과 협연하면서 느낀 거지만 연주자에게 잘 맞춰 줍니다. 윤이상 교향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평양음악무용대학교향악단과 연주를 해봤는데, 모두 실력이 출중합니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모차르트 등 유명한 곡을 알고 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연주는 순발력이 있습니다."
전국순회독주회에서 연주할 곡은 어떻게 선정했느냐고 물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노르웨이의 그리그, 러시아 제정 말 시대의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무소그르스키의 음악을 연주합니다. 대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국민주의학파의 음악이지요. 19세기 말 러시아 상류층에서는 민족적인 음악을 하류층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독일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작품들이 다른 나라로 유입되면서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여기에 자국의 민족주의 정서를 담아 새롭게 작곡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음악이 바로 국민주의학파입니다. 저의 동창이자 CF에서도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는 작곡가 신동일 씨의 곡도 연주합니다. 신동일 씨의 작품은 쉽습니다. 내가 자라온 느낌이 담겨 있지요. 곡 제목도 고무줄, 줄넘기, 즐거운 세상, 인형극..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아리랑, 돈돌라리 등을 작곡했던 북의 유명 작곡가 전권 씨의 음악도 연주합니다. 그의 곡들은 민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에 리듬이 굉장히 즐겁습니다."
전권 씨의 곡 '돈돌라리'는 '동 틀라니'가 변형된 것이다. 흥겨운 리듬이 돋보이는 이 곡은 북측 피아니스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다.
"2부에는 30분짜리 리스트의 곡 '소나타 나단조(Sonata in Minor)'가 준비돼 있습니다. 피아니스로서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저의 테크닉, 감성, 논리 등을 담아내게 될 것입니다. 리스트의 곡은 저에게 잘 맞습니다."
임미정 교수에게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평양이 편안했다.
"평양에 4번 갔는데, 처음 갈 때도 음악인으로 가서 그런지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를 가든 연주회 안내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평양은 다른 나라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일단 음식이 맞았습니다. 싱겁고 인공조미료를 좋아하지 않은 성격에 북의 음식은 제격이더라고요. 또한, 제가 기자나 정치인으로 갔다면 봐야 할 것을 봤겠지만 저는 그분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을 보면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습니다. 외국인 신분인지라 대동강가에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고요. 평양 호텔에서 양식을 먹을 때 빵 대신에 술떡이 나오고, 수프 대신에 꼬리곰탕이 나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북의 연주회장은 세계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공연문화가 발달해 있습니다. 국가적인 지원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죠.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고의 시설이 갖춰있다 해도 생존에 대한 부담이 큽니다. 자본주의의 이면이죠. 북은 예술단에 들어가면 무대에 서게 되고 프로페셔널이 됩니다. 어릴 때부터 재능 있는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때문이죠. 북측 어린이들의 노래를 듣는 남측 사람들은 정말 잘한다는 감탄과 함께 측은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이 좋아서 합니다. 그런 재능을 스스로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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