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그래 그 영화

야곱의 사다리 - 환영이 주는 삶의 해답, 애드리안 라인 감독 1990년작

이동권 2022. 8. 8. 11:26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 애드리안 라인(Adrian Lyne) 감독 1990년작


야곱의 사다리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빙자해 삶의 비극과 허무를 끄집어내며 관객들에게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당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겠는가?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한 줄기의 눈물,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속죄와 회한의 흐느낌처럼 구슬펐다. 비록 이 영화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을 상대로 환각제를 투여해 발생한 상황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공포영화지만 주인공이 죽기 전 펼쳐지는 환상이 던지는 메시지는 꼭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일생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거나 과거의 사건들이 토대가 된 어떤 미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과오를 저질렀는지, 또 평안한 마지막 순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느끼게 된다.

야곱의 사다리를 연출한 아드리안 린은 '로리타', '위험한 정사', '나인 하프 위크'로 이름을 널리 알린 감독이다. 그는 충격적인 영상과 줄거리로 영화팬들을 끌어 모았지만, 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준 작품은 야곱의 사다리였다. 다른 영화들은 그저 그렇고 그랬던 것 같다.

야곱의 사다리는 공포영화의 형식에 근접해 있지만 아주 다른 영화다. 기존의 공포 영화는 대부분 핏빛으로 물든 현란한 잔혹사였지만 이 영화는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 즉 우리가 보고 듣는 것 이외의 상상의 세계로 가슴을 조여 오는 독특한 공포물이다. 

고열을 내리기 위해 욕조에 들어가 얼음목욕을 하는 야곱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야곱은 베트남 전쟁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불구자가 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는 천부적인 감성을 소유한 젊은이였으나 잔혹한 전쟁으로 인해 아름다운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환각과 통증에 시달린다.

 

'나는 사람을 죽였지. 총과 칼로 잔인하게 그들의 심장을 찢어 놓았지.' 낭자한 살육의 향연, 죽어 가는 사람들, 자신의 몸에 박힌 총탄, 구출용 헬리콥터 헬기....

미국에 돌아온 야곱은 우체국에 근무하며 사귄 여자 친구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지압사에게 심신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조직으로부터 옛 전우들이 살해되고 미궁의 사건에 휘말리며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전투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신경성 물질을 무차별적으로 투여했다. 그리고 전쟁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피해자들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모두 야곱의 머릿속에서 스쳐가는 상상이었고, 그가 그려내는 가상의 미래였다. 실제로 야곱은 야전침대에 누워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지압사는 '이제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여라'고 조언한다. 야곱은 어린 시절, 사고로 죽은 아들의 손을 잡고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간다.

끔찍한 현실을 만들어냈던 환영의 실체를 벗어버리고 최종적인 상황에 도착한 영화는, 다시 나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던졌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죽음을 떠올리며 느끼는 인간의 자위적 공포 같은 것이었다. 

삶은 죽음으로서 소멸된다. 우리는 사는 동안 부정과 폭압을 목도하면서 수없는 고뇌와 절망에 시달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폭력과 절망을 좌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어치피 죽는 건 마찬가진데, 혹시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봐 자신을 선뜻 내놓기가 어렵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아홉시에 출근하고 여섯 시에 퇴근하거나 돈을 벌고 건강에 엄살떠는 것만 깊이 생각하며 일생을 맡기고 있다. 오직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와 이기적인 사회적 관계에 빠져 적당히 미화하고 적당히 대처하며 적당히 즐기는, 적당한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