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담배, 보청기, 두꺼운 안경... 김영승 선생의 첫인상은 나이 든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여느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적당한 키에 약간 마른 얼굴, 검은빛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머리카락, 두 볼은 세월의 깊이만큼 주름이 서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의지로 타오르는 검은 눈빛과 야무진 표정이었다.
붉은 꽃이 뿌려진 작은 화단을 끼고 좁게 난 골목을 따라 조그마한 문패 하나 없는 통일광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은근한 향을 내뿜는 국화꽃처럼 정성스럽게 일행을 반긴다. 친히 커피를 타면서 '도란스(변압기) 두 개가 달린 집'도 못 찾는 젊은이를 한심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병자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손길 같다.
손자뻘이 되는 나에게 담배를 꺼내 '함께 피자"고 권하는 모습은 속세의 법보다는 동지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우선이라고 여기시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김영승 선생이 어떤 얘기를 하실지 기대가 된다.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상상의 시간. 정신없이 쏟아지는 졸음과 함께 찾아오는 평화로움처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민족은 전쟁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미제가 패권주의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마당에 조미(북한과 미국) 간의 전쟁은 남과 북의 공멸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대단결해서 자주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민족공조를 통해 미제의 핵선제 공격도발 책동을 분쇄하고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민족자주, 반전평화, 애국통일이라는 3대 공조를 실현해서 조국통일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미군철수 남북공대위를 조직해서 미제를 몰아낼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해요. 미국이 남쪽에 완전하게 둥지를 틀면 자주통일은 어렵습니다. 남쪽에서는 자주통일을 지지하지만 북과 연결하는 것은 꺼립니다. 이는 민중들의 의식이 부족해서 그럽니다. 이것이 남쪽의 정서입니다. 우리는 남북이 합의하여 6.15 공동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미제는 6.15 공동선언을 파탄으로 몰고 있으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공화국 봉쇄압살책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영승 선생이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반도가 거대한 미제국이라는 방에 갇혀 공기조차 통하지 않은 것처럼 답답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연이어 담배를 물면서 굳은 표정으로 통일운동의 일꾼들을 꾸짖을 때는 더욱 그러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는 '나'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여전히 윤기 흐르는 '나'에 갇혀 살고 있는 것 같다.
"통일운동은 순수한 애국적 열정을 가지고 단결해서 건설해야 합니다. 주도권을 누가 쥐냐를 떠나서 말입니다. 우리 같은 장기수들도 그런 방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는 천 개가 넘는 단체가 있습니다. 통일연대, 민중연대, 범민련 같은 큰 조직도 있지만, 이들 단체를 하나로 모으려는 지도부의 노력이 부족합니다. 6.15 행사 때도 항상 나오는 사람만 나옵니다. 자기 단체가 참여했다는 듯이 얼굴을 보이는 것처럼요. 이는 자기의 이해관계로 모여 통일운동집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주통일 세력들을 모두 동원해서 나와야 합니다. 미군철수 투쟁에도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용산미군기지, 평택미군기지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합니다. 남조선의 총괄지도부가 있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어떤 투쟁인지 특성을 잘 파악하여 계획하고, 조직하고, 지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통일연대요. 회비 내는 사람도 적고 동원력도 없습니다. 이름만 걸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통일운동 세력들은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고 내 밑으로 들어와서 일하라는 식은 안됩니다. 개인보다 통일, 순수한 애국의 마음으로 매진해야 합니다."
김영승 선생은 상위운동의 개념과 하위운동의 개념에 수준과 역량 차이가 역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따라오지 못한다고 책망하지 말고 이끌어주고 밀어줘야 한단다. 투쟁의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좁혀나가야 하며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대화하며 단결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지리산 빨치산 비트 탐사에 열심이었다.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역사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외되고 금단에 묻혀있는 빨치산의 역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잊혀가는 역사를 새롭게 발굴해서, 이것이 우리 당대에 그치거나 혼자만 품고 있는 역사가 아니라 모두 공유하고 관심을 갖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남북이 하나 되는 자주통일의 단초가 되고 기여할 수 있다면요. 저는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역사적 자료를 만들겠다는 소명감, 제가 죽더라도 후대에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집회에 나가서도 젊은이들 틈에 끼여 사진을 찍습니다. 구석에 앉아 얼굴이 잘 나오지 않은 사람도 담습니다. 기행문을 쓰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과 함께 답사를 떠나는 것도 모두 이런 이유입니다."
평양에는 가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통일운동을 하는 젊은이라면 모두 가고 싶은 마음이 많다면서.
"아닙니다. 묵묵히 남아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도 좋아요. 나는 못 간다고 해서 서운해 할 필요 없지요. 바랄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북조선에 가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누구를 만났다, 봤다, 이럴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면서 남쪽의 정확한 현실을 알려야 합니다. 자화자찬하며 잘하고 있다는 모습만 보이지 말고 재야운동, 시민활동의 현실과 수준에 대해 의견을 나눠야 합니다."
분단된 조국의 젊은이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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