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성근 통일광장 장기수 - 신념 지키는 비결은 운동과 배움의 자세

이동권 2022. 8. 5. 21:15

이성근 통일과장 장기수


사사로운 탐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 커다란 지혜와 원숙한 정신세계로 스스로를 인도한다. 이는 현실적인 유혹과도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며 타인에게는 자비롭고 불의에는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선사한다. 이성근 선생. 그의 정신 안에는 이런 용기와 힘이 켜켜이 쌓인 듯하다. 

미국에 대해 물었다. 이성근 선생은 돌연 강렬한 투사의 눈빛이 되어 목소리를 높였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깨야 민족이 삽니다. 숭미사대주의는 민족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마비시킵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미제를 몰아내는 방법은 민중의 현장투쟁밖에 없습니다. 숭미사대주의자들은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민중을 탄압하고 있는데, 민중들이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스스로 만든 족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분단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앞날을 짊어져야 합니다. 민족의 운명과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하며, 요구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적개심, 분노, 오기로 투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적개심을 통해 남과 북이 손을 잡고 함께한다는 의식 발전을 이뤄야 합니다."

이성근 선생이 노령에도 조국통일에 대한 희망과 염원을 간직하고 사는 비결은 운동과 배움의 자세였다. 

"6시 기상해서 관악산을 1시간가량 구보합니다. 산에 오르는 기초실력도 아침운동으로 닦아진 듯해요. 그리고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입니다. 단지 비린 음식은 사양합니다. 저는 평생을 외롭다고 느껴보지 않았습니다. 딱히 우울한 적도 없었지요. 혁명운동 선배님들의 의연한 자세와 지도력을 통해 삶을 대하는 품성을 배워 왔습니다. 아직도 그 뒤를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성적인 눈을 갖고 있다면 자신이 선택한 삶의 과정에서 사심을 버리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진지하게 매달릴 필요가 있다. 돈과 보신을 기대하는 삶은 물거품 같은 허무주의만을 남길 뿐이다.

그는 죽기 전 로령학원 동지를 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2017년 11월 6일 꿈을 이루지 못하고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였다.

"빨치산 동지 39명이 1989년에 석방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일 뿐, 잠복한 동지, 전향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동지, 자포자기한 동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로령학원'에 함께 다니던 동지들을 1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로령학원'은 1950년 9.28 후퇴 후 17세에서 25세의 젊은 청년들을 각 군면단위에서 추천을 받아 빨치산의 군사, 정치 간부를 육성하는 학교였다. 그 당시 40여 명이 있었으며 교양과 군사훈련 등을 가르쳤다. 1951년 대공세로 남로당 전북도당 산하 모든 기관들이 후퇴하고 빨치산이 사라지면서 로령학원도 역사 속으로 묻혔다. 로령학원은 전북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 안시내 골짜기에 있었으며, 이곳은 '조국전북유격대사령부'가 있었던 빨치산 전적지 중의 하나다.

"그때 배웠던 유격전술을 제 인생에 많이 적용하고 있어요. 유격 전술의 기본은 자기를 보존하면서 적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 공조를 통해 남과 북이 손을 잡는 것도 유격 전술로 얘기하자면 기습과 매복일 테고요. 자기를 보존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량을 강화하고 정치적, 대중적으로 통일을 일궈내기 위한 자기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천박한 물질문명이 판치는 세상,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는 세상에 그의 원칙을 지키고 신념을 수행하는 모습은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만하다. 

 

사회는 관습과 법으로만 지탱되는 듯하다. 그로 인해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많아 주위 사람들의 아픔과 우리 민족의 상처에도 자각하지 못하며 따뜻한 손을 내밀지도 못한다. 이성근 선생이 말하는 유격 전술, 우리 민족의 단죄 앞에 서서 부끄럽게 반성하는 과정을 통해 조국의 통일을 일궈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