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바란다면 자기 재산의 반절을 내야 합니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남녘 형제들이 반절을 내서 북녘 동포들의 생존권을 책임져야 합니다. 돈을 벌거나 안 벌거나 기회가 온다면 꼭 내야 합니다. 동권 씨도 내야지요?"
'동권 씨'라는 말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먼 곳에서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처럼 맑고 강렬하다. 소박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게 되는 껄끄러운 마음은 포근한 솜털처럼 수그러들고 만다.
성직자를 대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 혹은 선입견이 컸던 탓이다. 그러나 정상덕 사무총장에게서는 고상한 성품이나 엄숙함에서 흘러나오는 전형적인 성직자의 모습보다는 친형님을 대하는 친숙함이 먼저 느껴졌다.
"제가 성직자를 선택한 것은 하나의 삶의 질서를 택한 것뿐, 별 게 아닙니다."
정상덕 사무총장에게 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됐는지 물었다. 그러나 깊게 숙고하지 않고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 같아 왠지 머쓱해진다. 그는 이미 성직자다. 그러므로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성직을 수행해 가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정 사무총장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검은색 매직을 꺼내 경쾌하게 성인성(聖) 자를 썼다. 그 모습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다정스럽다.
"성직자에서 성(聖)은 성인성 자를 쓰는데, 그 뜻은 듣고(耳) 말하는(口) 것을 임금(王)처럼 하라는 것이죠. 이는 개인의 삶보다는 민중의 삶을 대변하고 어려운 삶을 안아주며 차별과 억압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앞에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직자는 절대로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적 명예심에 불타서는 안 되지요."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쑥스러운 일일 것이다. 참으로 어렵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직자의 길은 제가 그토록 염원했던 길입니다. '남을 돕고 사는 길'이지요. 수학을 좋아했다면 수학자가 됐겠지만, 저는 함께 살아가면서 뭔가를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상덕 사무총장은 자신의 생각을 시원하게 털어놓는 사람이다. 멋진 언어와 깨끗한 말솜씨에서 느껴지는 세련됨도 좋지만, 솔직한 성품에서 우러나는 구수한 웃음과 섬세한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다. 성직자 특유의 조숙한 염려를 들으면서도 매운 다정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민족은 분단병이 있습니다. 북한을 주적으로 생각하는 국가보안법도 그렇고, 북측 사람들의 인권을 말살한다면서 정권 타도를 외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는 분단병 환자들이 만든 병이며 민족의 슬픔입니다. 그 이유는 다르지 않습니다. 무지가 부른 것이죠."
배에 힘을 주어 말하듯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뭔가 그의 마음속에 답답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분단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김일성을 생각하고, 어떤 무리는 그가 항일투쟁을 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있죠. 김일성은 우리 민족 아닙니까. 김일성이가 무슨 도깨비입니까. 이는 분단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올바른 마음으로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있어서 그럽니다. 북녘 동포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이해하고 남측이나 북측의 체제와 비전을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부정하니까 서로 의심하고, 만나지 못하며, 문제가 꼬이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만 하고 있습니다. 북측에 대해 왜곡하지 말고 서로 인정해야 하며 그런 전제하에 통일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고 하나의 형제자매로 인정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주통일의 열쇠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미국놈들 몰아내는 것도 그렇고."
그의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쾌했다.
정상덕 사무총장은 원불교 인권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평화의 친구들, 청년회, 사회개벽 교무단에서도 활동하고 있으며 사형폐지를 위한 범 종교연합에도 참여하고 있다.
"원불교는 독립된 종교입니다. 불교를 무상대로라 하여 모두 인정하고 있으나, 원불교는 불교의 종파가 아닌 독립된 종교지요. 이는 대종사가 조선불교혁신론을 쓰면서 신앙의 대상을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불상이라는 형상을 없애고 본질로 바로 들어가자는 거지요. 부처님의 형상이 금인가 은인가, 십자가가 크냐 작으냐와 같이 밖으로 드러난 형상을 쫓지 말고 본질을 찾아가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의 일원상은 차별 없고 평등하며, 인류는 전체적인 하나로써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 사무총장은 원불교 교리서를 손에 쥐여줬다. 딱딱한 책이어서 읽지 않겠지만, 주고 싶다면서.
"원불교는 차별 없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다함께 어울려 사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서로에 대해 감사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단을 중심으로 교육사업(학교, 보육원), 자선사업(복지, 봉공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교단에서 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활동은 청년회와 인권위원회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남북이 갈라져 있고, 미 제국주의의 칼날이 날카롭고, 더욱 양극화로 뻗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개탄하면서 미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 특히 원불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종교는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입니다.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의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동국대에 있는 불상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학생들의 행동은 맹목적인 포교가 주는 부작용으로써, 타 종교의 심려와 불쾌감을 주는 일입니다. 서로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종교연합활동을 열심히 해서 사회 통합과 화합을 위한 역할을 종교가 분담해야 합니다. 평화와 인권에 대한 모든 종교의 생각은 같습니다. 서로 끊임없이 만나서 사회를 변혁하는데 도움을 줘야 하며 정치적 억압 구조와 사회 불평등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는 행복에 대한 지향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가 사회봉사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사회개혁을 향한 고삐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도문제를 보세요. 한국사람들 너무 공부 안 합니다. 백제를 연구하는 일본인이 500명인데, 한국은 고작 50명 정도입니다. 해방 이후 독도를 연구했던 사람은 3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들었고요. 민족의 정기를 지켜내는 일이 자본에 휩쓸려서는 안 되겠죠. 스스로 올바르게 알아야 하며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는 인권과 평화 운동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미신에 이끌리지 않고 현실을 냉철하게 보는 것이 필요하며, 이로부터 현실의 동력과 비전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 사무총장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를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종교 간에는 칭찬도 비난도 조심해야 하며 대화하고 포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전제에 둔 말이다.
"인권운동은 자기성찰입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진심을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하죠. 폭력, 갈등, 불신 등을 버리고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합의된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맺어야 하고요.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사회 통합은 깨지고 맙니다. 소년원에 가보면 눈물이 납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이기 전에 왜 그런 범죄가 일어나게 됐는지 살펴보면 눈물이 납니다. 아이들의 범죄는 사회가 만든 것입니다. 평등, 평화의 상징이 원불교입니다. 화합의 심벌이기도 하고요. 원불교는 북녘의 동포와 하나라는 생각으로 상호주의적인 입장에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최초로 금강산 평화 기행을 시작으로 탈북자 학교, 새터민 초중고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북 한 삶 운동(평화의 친구들), 평양의 빵공장을 통해 년에 5,000만 원가량을 지원하고 있지요. 또한, 민족의 살풀이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을 위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 이것이 한민족의 응어리를 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역사를 가르치고, 살육과 억압의 현장을 기행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노근리, 지리산, 망월동 등에서 위령제를 통해 역사의 슬픔을 위로하고 있지요. 이는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의 과정일 것입니다."
정 사무총장은 질곡 같은 민중의 역사가 함께하는 곳이라면 해외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 히로시마, 캄보디아, 베를린 역사기행, 쓰나미처럼 큰 재앙이 닥친 곳에는 봉사활동도 하며 청년, 대학생, 탈북자, 외국인노동자들과 함께 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사람들은 이해관계나 명예에 얽혀 기득권만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비정규직이 만들어지고 빈민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핵폐기장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민중의 땅을 보전할 것이냐, 민중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 것이냐에서 출발해야 할 문제입니다. 핵에는 자본과 정치권력, 미국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을 핵 마피아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자본과 권력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삶에는 민족의 역사나 민중의 삶은 없습니다. 한국에서 핵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대우를 받아도 대안에너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원조차 원활하게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숫자도 매우 적지요. 이 게 말이 됩니까?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만 구하려 들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야 합니다. 차별이나 불신을 떠나 평화와 인권의 눈으로 정의와 불의를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는 현장 속에서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직자는 계급이 아닙니다. 단지 봉사자요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내고, 뜻을 세워야 합니다. 책상에 앉아 있지 말고 뭔가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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