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의심이나 비난의 말을 하지 않고 정다운 미소와 끊임없는 지원으로 후학들을 대한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차갑고 비열한 것들로부터 스스로 방어막이 되길 자처하며 진실로부터 얻는 평화의 의미를 알게 한다. 인고의 세상에 섞이는 순간에도 일신을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법이 없으며, 그럴수록 더욱 자신의 일에 묵묵하게 매진하는 심성을 꺾지 않는다.
스승에게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삶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독특한 힘이 있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리하여 인간 본연의 정서로 만나 서로 껴안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정신적인 윤택함으로 세월을 익히고 하루하루 성숙한 빛으로 물들며 선명함을 더해주는 스승, 나날이 푸름을 더하는 봄의 색조를 감상하면서 스승의 넓은 마음에 존경의 그림을 그려본다.
우리 시대의 스승,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리영희 선생과의 대담을 책으로 엮어서다.
기다란 눈썹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그는 한 폭의 동양화에 등장하는 신선처럼 삶을 아우르는 듯한 수양의 깊이가 첫인상에서 느껴진다. 어설픈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면서도 과거사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꾸짖는 모습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스승의 기풍이 서려있다.
임헌영 소장은 "올바른 과거청산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라면서 "정부는 올바른 과거사 청산보다는 명분을 찾아 움직이고 있으며 일본과 손잡을 가능성도 엿보인다"고 강한 어조로 성토했다.
"일본은 당장 아시아 지배 야욕을 버리고 자국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며 산적한 과거사들을 청산해야 합니다. 일본은 이미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나라입니다. 상대국의 약점이 있으면 그 약점을 자국의 실리로 이용하는 무서운 나라입니다."
임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동맹을 예로 들었다. 1938년 독일이 일본에 동맹을 제안했을 때, 일본은 바로 응하지 않았다. 전세를 지켜보면서 결정하겠다는 간교한 외교방식이었다. 일본은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석권하자 동맹을 수락했다. 이로써 일본은 독일동맹을 통해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를 싸우지 않고 점령했으며, 일본군 주둔비를 프랑스가 내도록 했다. 전세와 자국의 이익을 따라 교활하게 움직이는 일본의 외교술에는 혀를 내두를 만하다.
"지금 남북민족문제는 한반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 전체와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이며, 이 문제는 미국과 일본의 야욕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아시아 민중들이 절실하게 느끼고 대처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정치도 미, 일 양국과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새롭게 도약할 수 있으며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정체된 한국정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든든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임 소장은 일본의 독도 망언이나 교과서 왜곡의 본질에는 세계2차대전에서 좌절된 군국주의적인 욕망을 다시 펼쳐보겠다는 야심이 숨어있다고 진단했다. 50년밖에 지나지 않은 제국주의적 야욕을 버리지 못한 일본의 '신정한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은 미제국과 함께 손을 잡고 역사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교과서 왜곡만으로 보면 별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 '신정한론'이 깔려있어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학자가 잘못 표기한 것을 국가가 수정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이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게 있습니다. 이승만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부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동아시아 전 지역의 공동책임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는 더욱 심하지만요. 우리는 전범을 모두 처단해야 했습니다. 친일 문학 작품도 그렇습니다. 한국의 15여 개 교과서를 보면 아직도 친일 작가들의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흔히 친일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문학사적으로 없앨 수 없다고 합니다만 제 판단으로는 독립운동을 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훨씬 미학적으로 훌륭해 보입니다. 예술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폄하하며 친일문학을 옹호하는 발상은 맞지 않습니다. 외치는 내치의 연장입니다. 지금 진보당, 보수당, 시민단체, 학계, 관변 등 할 것 없이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 과거사를 청산해야만 동아시아 평화정착을 이뤄낼 수 있으며 경제도 살릴 수 있습니다.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주체자생력을 재생산하면 통일도 이뤄집니다. 구호보다는 과거사를 청산하는 노력 자체가 모든 문제의 근본입니다.
임 소장은 어떻게 여가생활을 보낼까.
"제가 쉬는 방법은 단전호흡을 하면서 TV를 보는 것입니다. 30분만 해도 기운이 납니다. 또 음악, 예술, 여행, 예술 전 분야를 좋아합니다. 특히, 음악 중에서도 러시아 민요를 편애하지요. 카투사, 모스크바의 밤, 볼가강의 뱃노래, 백만 송이 장미들을 주로 듣고 부릅니다. 하지만 노래방은 싫어합니다."
그는 커피, 콜라,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는다고 했다. 미제의 상징이라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자신이 도식적인 반미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했다.
임영헌 소장은 리영희 대담집 이후 계속해서 책을 낼 생각이다. 내가 평론이냐고 묻자 연구서 형식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소설은 쓰지 않느냐고 다시 묻자 그는 창작이 가장 고귀한 것이라면서, 소설은 어려워서 잘 못쓰겠더라며 웃어버린다.겸손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이었으며 평론가로서의 직업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었다.
"문학가로서의 저 자신과 본질이 다른 일로 징용당한 느낌입니다. 13년 동안 글은 아주 많이 썼으나 책을 내지 못했으니까요. 왜 책을 내지 못했냐면, 동유럽 해체 후 저를 재정립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반성과 성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 내가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승 소년빨치산, 통일광장 대표 - 윤기 흐르는 '나'에 갇혀 살고 있을까? (0) | 2022.08.05 |
---|---|
정상덕 원불교 인권위원회 사무총장 - 우리 스스로에게 있는 자주통일의 열쇠 (0) | 2022.08.05 |
조은영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대표 - "청소년 토론하는 장 만들고 싶어" (0) | 2022.08.05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 글 쓰는 일은 민중에 대한 애정의 열매 (0) | 2022.08.05 |
정광태 가수, 독도명예군수 - "남북 통일된다면 아무도 못 건드려" (0) | 2022.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