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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별들 - 광주학생운동의 그날, 김강윤 감독 1959년작

이동권 2022. 7. 30. 14:46

광주학생운동 ⓒ한국영상자료원


하늘을 보려면 얼굴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 앞만 응시하거나 발밑만 내려다보면 하늘을 볼 수 없다. 억압과 탄압보다 강한 것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짊어진 채 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용기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보고 있는 그 이상의 세상을 절대로 볼 수 없다. 삶은 원천적으로 우연이 없다. 외부의 영향에 수시로 바뀌는 것 같아도 모두 스스로 만든 삶이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절, 학생들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들고 봉기를 일으켰다. 3.1만세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펼쳐진 대중 항일투쟁 ‘광주학생운동’이다.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은 광주학생운동의 역사 중에서 광주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가 11월 12일 대규모 시위운동을 조직하는 부분을 그린다.

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이 계기가 됐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을 희롱하자,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춘채와 친구들이 저들에게 달려들었고, 이 싸움은 일본인 학생 대 조선인 학생의 패싸움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 편을 들어 조선인 학생을 구타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1월 3일 광주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에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광주시내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외쳤고, 박기옥 희롱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했던 광주일보에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일제는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했다. 광주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신간회를 비롯한 조선청년동맹과 학생전위동맹은 조사단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광주의 학생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를 모태로 결성된 독서회 중앙본부, 광주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해 시위를 전국적이고 전면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광주 학생들은 11월 12일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이 날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서울에서는 12월 9일 12,000명의 학생들이 11일부터 13일까지 가두시위를 펼쳤고, 이 중에서 1,400명이 체포됐다. 광주학생운동은 이듬해 3월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만주나 일본의 조선인 학교와 유학생들도 시위운동에 연대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은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이었다. 이는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학생들의 투쟁 형태는 ‘동맹휴교’에서 벗어나 ‘가두시위’로 발전했고, 학내 문제로만 머물던 구호도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으로 수위가 높아졌다.

 

광주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 성진회 ⓒ한국영상자료원
봉기에 나선 광주 학생들 ⓒ한국영상자료원


이 영화는 ‘삼가 이 한 편을 광주 학생 독립운동에 쓰러진 이름 없는 별들 앞에 바치나이다’로 시작한다. 독립지사의 아들 상훈과 친구들은 항일독립운동체인 성진회의 멤버다.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는 한문 선생님 송운인이다. 어느 날 성진회에 오빠가 고등계 형사로 일하는 영애가 가담한다. 형사들은 명치일 시위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이 모여만 있으면 해산을 종용한다. 호떡집에 모인 학생들을 보면서 집에 가라고 종용하는 형사에게 사장 왕서방과 그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속이 시원하다. “빌어먹을 자식들, 조선에 와서 사는데 일본법이 어딨어.” 성진회 멤버들은 우여곡절 끝에 거사를 결정한다. 하지만 성진회 모임이 형사에게 발각돼 영애가 오해를 받지만 죽음을 무릅쓴 행동으로 멤버들을 살리고, 다음날 광주 학생들은 봉기한다. 여기서 감동이 전율한다.

<이름 없는 별들>은 독립운동을 그려낸 영화지만 제작 의도만큼은 순수하지 않다. 이 영화는 1959년작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51년 사사오입으로 대통령이 된 뒤 1956년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투표 며칠 전날 사망해 세 번째 연임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론이 악화되면서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때 이승만은 ‘반일’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정국을 돌파하려고 했다. 자신의 항일운동 이력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삼고, 그 홍보수단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영화를 선택했다. 같은 해 발표된 영화 <독일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승만과는 무관한 내용을 다뤘지만 정부의 막대한 협조를 받아 제작될 수 있었다.

그런 노림수를 잘 몰랐던 광주 사람들은 이 영화를 촬영하는데 적극 협조했다. 당시 광주시내의 중고등학생을 비롯해 전체 광주시민은 시위대 엑스트라에 자원해 영화를 실감나게 표현하는데 도움을 줬다. 이 영화는 다양한 세트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지만 촬영과 편집이 안정적인 것이 특징이다. 또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김강윤 감독의 작품답게 빈틈없는 구성도 돋보인다. 게다가 시나 노래 등 예술적인 것도 적절하게 결합시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