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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 조국 독립과 정의 실현의 의지, 윤봉춘 감독 1959년작

이동권 2022. 7. 30. 14:27

일본인 재판장을 혼내는 유관순 ⓒ한국영상자료원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우리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다. 하찮은 물건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것도 화가 날 일이다. 하물며 땅과 주권, 민족의 정기까지 빼앗긴 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정의로운 사람에겐 더욱 참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한일합병 당시 위정자들의 무능,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일진회 등 매국노들의 반역,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묵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수치와 모욕을 넘어선 분심을 느끼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 지배를 영구 예속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했다. 또 국민에게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고, 식량이나 자원 등을 수탈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운동의 상징이자 구심점이 된 인물이 바로 유관순이다.

영화 <유관순>은 강건했던 유관순 열사의 삶을 조명한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만세운동을 조직한 그녀의 의지와 기상을 그려낸다. 모두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정의를 회피했을 때 유관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온통 조국 독립과 정의 실현으로 꽉 차 있었다.

유관순의 절절한 마음은 영화 속 독백과 기도로도 알 수 있다. 유관순은 오빠가 만세 운동의 주모자로 잡혀가자 산봉우리에 홀로 올라간다. “삼천리강산이 불안스러워도 무심히 잠자는 내 고장의 사람들. 난 그들을 붙잡고 애원도 해보고 하소연도 해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느님 아버지. 주님께서 갈보리 산정에서 피를 흘리시므로 만백성을 죄에서 구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아우내 장터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나라를 찾게 되는 것을 더욱 뼈가 저리도록 느꼈사옵니다. 대한의 딸 관순이가 이렇게 비오니, 저에게 위대한 능력을 주시옵소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한국영상자료원
일제의 고문의 죽은 유관순 아버지 ⓒ한국영상자료원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다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후 고향 천안으로 내려갔다. “우리들 손에서 떨어진 태극기와 삐라, 만세를 불렀다고 놈들을 우리를 내쫓았다. 학교 대문을 판장으로 가로막고 헌병들을 시켜 보초를 섰다.” 유관순의 성격은 당찼다. 유관순은 자신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잡혀가는 학생을 걱정하는 친구에게 냉정하게 말한다. “잡혀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독립되느냐가 문제지.” 유관순은 전국적으로 일어날 계획이었던 만세운동에 동네 사람을 들 참여시키기 위해 조직에 나선다. 40여 부락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설득시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성공으로 이끈다. 유관순은 주모자로 순사에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그래도 유관순은 흔들리지 않았고, 재판정에서도 일본인에게 저항한다. “한국은 한국 사람에게 돌려보내고, 일본 사람은 일본으로 가라. 왜 남의 집 안방에 들어와서 생떼를 쓰느냐 말이다. 내가 너의 집 안방에서 생떼를 부리면 좋겠느냐.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다. 내 부모를 죽인 그 칼로 너희들이 망할 것이다.”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수감자들을 독려해 만세운동을 계속한다. 결국 유관순은 감옥 지하에서 죽음을 당한다. 2013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유관순은 ‘옥중 타살’됐다.

유관순의 실제 모습은 영화 속 인물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톡톡 튀고 생기발랄한 배우 도금봉의 이미지는 유관순의 진짜 모습을 궁금케 만든다. 또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의 역할로 미국인 배우가 참여한 점도 신선하다. 아울러 만세운동을 막으려는 일제 순사와 헌병들의 철통같은 경계에도 굴하지 않고 유관순이 동네 아주머니들을 일일이 찾아가 만세운동을 조직해가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어떤 목표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가르쳐주는 바가 있다. 만약 유관순이 저렇게 열정을 쏟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의 씨앗은 심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보배롭고 거룩한 영혼이다.

영화 <유관순>은 삶과 사랑, 용기와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독립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던 16세 소녀 유관순의 짧은 생애를 그리지만 동시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역사물이기도 하다. 유관순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정의를 위해 싸워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항상 정의가 이기는 것은 아니다. 만세운동도 조선에 독립을 안겨주지 못했다. 하지만 유관순의 만세운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고, 실제 이날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한국전쟁 후 만들어져서 그런지 조선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 명을 쓰는 점이다. 또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도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일각에서는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화를 시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해방 후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 등에 의해 유관순 기념사업이 추진됐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을 부각했다는 의혹이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조선인을 전쟁터에 보내는 데 앞장선 친일파였고, 박인덕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고증과 역사의식이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