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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장 -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전통 미풍, 한형모 감독 1959년 작

이동권 2022. 7. 30. 14:32

자기만 아는 여사장 요한나가 용호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전쟁은 인류의 모든 죄악과 파멸을 연출한다.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승자에게는 막대한 부와 힘, 영광을 안겨 주겠지만 동란은 승자나 패자 할 것 없이 불안과 두려움, 상처를 남긴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민족상잔이라는 극명한 비극과 함께 인류애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철저하게 파괴했고, 전후 평온해야 할 일상마저 생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전통적인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삶과 죽음을 오가는 고통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의 경계조차 허물었다. 한국인들은 죽음과 기아의 공포를 겪으면서 예의와 명분보다 물질과 실용을 중시하게 됐으며, 이러한 생존 본능은 기회주의의 만연을 낳았다. 전쟁은 비윤리적인 부패와 범법도 관용케 했다. 이 또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의 하나로 인식돼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됐다. 전쟁은 허무주의와 퇴폐 심리도 확산시켰다. 덧없이 사람이 죽고 재산이 파괴되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보다 순각의 쾌락에 몰두했다.

미국도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은 미국에 대한 맹신을 낳게 했다. 이남지역까지 밀렸던 전세가 미국의 참전으로 역전되면서 한국인들은 미국의 강력한 힘을 실감했다. 그래서 미국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추종하게 됐으며, 심지어 미국인의 말이나 패션, 제품, 라이프 스타일 등 미국과 관련된 것은 무조건 좋아하고 모방하는 사람도 생겼다.

 

영화 <여사장>은 한국전쟁 후 변해버린 한국인들의 가치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서구적 가치와 스타일에 대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들을 통해 195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그려 낸다. 동시에 물질주의와 숭미주의에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으로의 회귀를 강조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 중에는 구시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것도 많고, 허례의식이나 신분제도에 따른 권위적인 것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꼭 잊지 말고 지켜야 할 덕목들도 많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이웃과의 예절, 부모에 대한 효도, 민속놀이나 판소리, 한글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옳다고 하겠다.

 

요한나와 싸우는 용호 ⓒ한국영상자료원
사장이 된 용호 ⓒ한국영상자료원

 

잡지사 여사장 요안나는 페미니스트다. 사무실에 여존남비라는 현판을 걸어 놓을 정도다. 어느 날 요안나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처음 보는 청년 용호에게 봉변을 당한다. 용호는 일자리 찾던 중 요안나의 잡지사에 지원한다. 요한나는 용호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전에 당한 봉변에 복수할 마음으로 그를 채용한다. 하지만 용호는 번번이 여사장과 부딪치며 그녀의 고집을 꺾는다. 요안나는 그의 남성다움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용호와 여사장은 결혼한 뒤 사장 자리를 용호에게 넘긴다. 그리고 현판은 남존여비로 바뀐다.

이 영화에서 요안나는 최은희와 함께 당시 최고의 미녀배우로 꼽히는 조미령이 맡았다. 당당하고 발랄한 조미령의 매력을 이 영화에서 확인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또 여사장과 용호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피식 웃음이 나게 만든다. 반면 두 사람의 싸움이 남자의 승리로 끝나는 결말은 당시에는 무척 당연했겠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좀 의아할 것이다.

이 영화는 제1회 문교부 우수국산영화 촬영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