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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미륵 - 지도자의 덕목, 이태환 감독 1959년작

이동권 2022. 7. 30. 14:41

양길장군 일행을 위기에서 구하는 미륵 ⓒ한국영상자료원


엄격한 자기 통제는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관리하지 않는 지도자는 어느 누구도 먹어 주지 않는다.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없다.

누구나 얘기하는 용기와 결단력, 책임감, 계획성, 실천력 같은 미덕도 지도자에게 필요하겠다. 또 공정한 상벌과 정의로움도 요구된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는 마음을 따뜻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굳세고 강인한 몸과 정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인정도 있고, 허물도 감싸고, 봉사할 줄도 알아야 지도자라 하겠다.

영화 <왕자 미륵>은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지 살짝 알려 준다. 출생의 비밀과 로맨스에 치중한 나머지 미륵의 됨됨이를 제대로 부각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어지러운 혼란의 시대에 미륵이 어떻게 사람들을 규합하고 최고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 그 이유 정도는 가늠이 가능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미륵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다.

궁예의 남다른 면모는 역사서에서도 포착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소년 시절 절에서 생활할 때는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뱃심’이 있었고, 절을 떠나 반란군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돼서는 ‘부하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모든 일에 공평무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궁예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나라를 세운다. 영화는 딱 여기까지만 그린다. 왕이 된 이후 궁예는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악행을 일삼다 백성들에게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궁예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타고난 지략과 힘으로 왕이 됐다. 그러나 자신을 미륵으로 자처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관심법으로 사람들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또 이 술책으로 포악한 짓을 서슴지 않으면서 여태까지 쌓아왔던 모든 명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 후고구려를 세운 지 15년, 그 당시 궁예가 얼마나 악독하고 패륜했는지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궁예의 부인이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고 충언하자 궁예는 오히려 “너는 다른 사람과 간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인이 기가 막혀하자 “나는 신통력으로 알 수 있다”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고, 두 자식의 목숨 또한 빼앗았다고 전해진다.

KBS드라마 <왕건>을 보면 궁예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건국공신 왕건에게도 관심법을 들이대 반역을 모의한 사실을 실토하라고 한다. 왕건은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반역을 꾀했다고 무릎을 꿇고, 궁예는 이런 왕건의 태도에 크게 기뻐하며 하사품까지 내린다. 궁예의 충신으로 최선을 다하려 했던 왕건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대목이다.

궁예는 애꾸눈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왜 애꾸눈이 됐을까? 궁예는 신라 진골 출신의 귀족으로 전해지지만 나라에 이롭지 못한 사주를 가졌다는 이유로 죽을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궁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차마 핏덩이를 죽이지 못하고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마침 젖을 먹이던 유모가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해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됐다.

영화 <왕자 미륵>은 픽션이다. 역사 속 진실을 일부 차용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미륵과 백화의 로맨스 ⓒ한국영상자료원
전쟁에 동원된 대규모의 엑스트라 ⓒ한국영상자료원

 

신라 말, 경문대왕 장례식에 가기 위해 도성으로 향하던 양길장군과 딸 백화 일행이 도적의 습격을 받는다. 그때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청년 미륵의 도와 이들은 위기를 모면한다. 미륵은 이들을 따라 도성에 가고, 어머니로 알고 있던 유모로부터 출생에 관한 비밀을 듣는다. 미륵은 경문대왕의 아들로 그의 친어머니는 경문대왕이 총애하던 후궁 설마마였다. 그러나 이를 질투한 왕비와 간신들의 모함으로 설마마는 세상을 떠났다. 미륵은 충신 원달과 함께 궁에 들어가 자신이 왕자라고 밝히지만 오히려 왕비와 간신들에게 역적으로 몰려 쫓긴다. 궁예는 부상을 입고 산 중에 있는 절에서 머물다 북원성에 군사를 일으킨 양길 장군과 원달, 백화와 재회한다. 미륵은 백화, 원달 등 충신과 함께 힘을 합쳐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신라와 화친을 맺은 뒤 나라 마진을 세운다.

<왕자 미륵>은 1950년대 당시 제작사들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돈과 공이 들었는지 알려 주는 예다. 평원 전쟁 장면에 동원된 대규모 엑스트라와 박진감 넘치는 교전, 실제 왕실처럼 재현된 세트, 화려한 궁중 의상 등은 이 영화의 볼거리를 더한다. 또 적극적이고 활달한 백화와 미륵의 로맨스는 딱딱한 사극을 한층 부드럽게 해준다. 아무래도 흥행을 의식한 설정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