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 없다. 어떤 운명이라도 헤쳐나가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노력하고, 배우고, 기다려도 평화가 찾아오질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무섭게 어둠이 내리고, 굶주림과 비웃음이 번지고, 최악의 불행이 엄습할 때는 얌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마디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떠했겠나. 그래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영화 <촌색씨>의 주인공은 평범함 시골 처녀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이 여인은 시댁 식구들의 구박에 매일 시달린다. “아니 너는 손에 가시가 돋쳤냐. 아이고 귀신도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안 데려가고. 저리 비키지 못해.” 나이 어린 아들도 할머니, 고모가 가르친 대로 엄마에게 손가락질한다. 가장 사랑해야 할 가족에게 두들겨 맞는 이 여인에게 누가 욕을 할 수 있을까? 왜 그렇게 참고 살았냐고 말해봤자 위로도 되지 않는다. 단지 돈 좀 있고, 배웠다고 우쭐대는 시댁 ‘싸가지’들에게는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는 남편도 아연하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겸손하면 빈자들의 벗이 되고, 용기 있는 사람이 교만하지 않으면 약자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사고, 진심으로 따르게 만든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시댁 ‘싸가지’들은 겸손이나 친절하고는 거리가 멀다. 자만, 오만, 거만으로 똘똘 뭉쳐 순진하고 착한 며느리를 마귀로 만든다. 며느리를 구박하는 모습에서는 이들의 욕망이 보인다. 자기 자신의 힘과 위력을 과시하면서 느끼는 일종의 쾌락이 이들의 폭력에서 포착된다. 또 재산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도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도 천박하고 탐욕스러워 욕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공했다.
대학 동창 김동환의 시골집을 찾은 장경호는 동환의 동생 옥경과 사랑에 빠진다. 옥경은 오빠가 반대하지만 경호를 따라 상경해 경호의 소개로 동일상사에서 일한다. 경호는 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옥경과 결혼 하지만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옥경을 구박한다. 오히려 무용을 전공한 시누이의 친구를 며느리처럼 대한다. 속셈이 있다. 경호는 전처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재산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경호가 미국에 파견근무를 떠나자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옥경이 남자를 집안에 몰래 들였다는 누명을 씌워 쫓아내고, 옥경은 오빠에게 의지하려 하지만 내차게 외면당한다. 옥경은 고아원 교사로 외롭게 살다 몇 년 뒤 성장한 아들 영철을 본다. 그러나 아들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말만 듣고 옥경을 ‘나쁜 여자’라고 욕한다. 옥경은 충격을 받아 미쳐버리고 오빠 옥경을 집에 데려간다. 경호는 귀국한 뒤 옥경이가 누명을 쓴 진실을 알게 되고 옥경에게 용서를 빈 뒤 서울로 데려온다. 하지만 이미 옥경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만 가득하다.
<촌색씨>는 요즘 나오는 막장 드라마의 원조 격으로, 1950년대 발표된 한국영화의 70% 이상을 차지했던 멜로드라마 중 하나다. 이 영화는 무기력한 여성을 극단의 고통으로 몰고 간다. 남성은 그저 여성들의 일로 치부하며 극한의 우유부단함을 선보인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이 영화를 보면서 혀를 차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한국전쟁 후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시기였는가. 이 영화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신파극의 형식이었지만 이봉래 작가의 세련된 시나리오와 착하고 강인한 최은희의 캐릭터가 잘 어우러져 색다른 감동을 준다.
이봉해는 모더니즘 시 운동과 문학평론을 병행했다. 또 영화평론가 협회의 회원으로서 신문 지면에 영화 평론을 썼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했던 점은 한국 영화계가 설화나 역사적 소재에만 집착하거나 새로운 유행만을 좇아 새로운 시대와 그 도덕성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게을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봉해는 1957년 장덕조의 소설 <다정도 병이련가>를 각색하며 영화 제작 일선에 뛰어들었다.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등불로 남을 비추면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다는 얘기가 있다. <촌색씨>에 등장하는 시댁 ‘싸가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지만 결국 모두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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