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절제된 유머가 최고의 웃음을 주듯이 사랑도 주의 깊은 언행에서 가치를 발한다. 약혼식 날 다른 여인의 사사로운 간청을 이기지 못해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비록 살인누명을 쓴다고 해도,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책망할 수 있는 대상은 자신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최대 적은 자신이며, 가장 극복해야 할 대상도 자신인 셈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 영화 <순애보>는 고개를 자연스레 끄덕이면서 보게 된다.
<순애보>는 인격이 고결한 남자의 태도 때문에 엉뚱하게 흐른다. 기독교적인 휴머니즘과 통속적인 소재도 그 당시 일반적인 경향에 맞지 않으며, 이 영화의 흥미까지 떨어뜨린다. 특히 깎아지는 절벽 위에서 ‘나 잡아봐라’를 외치며 도망가는 장면과 교수형을 당하는 꿈을 꿀 때 흘러나오는 찬송가는 손발마저 오그라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애틋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은 이 영화가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랑과 인품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행동과 겸공한 마음을 잃지 않았고, 여자는 타인의 증오와 멸시에도 남자를 믿고 끝까지 사모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경심에 가까웠다. 결혼은 사랑도 있어야 하지만 존경심에서 비롯돼야 한다. 존경하는 부부는 서로 언행에 신중하고, 먼저 챙겨주며,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삶은 자연스럽게 품격이 높아지며, 어떤 고난이 닥쳐도 꿋꿋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러나 형편없고 편안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말하고, 폭행하고, 외도하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가능성이 높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키면서 ‘사랑은 실패가 없다’고 알려준다.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연인들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하지만 꼭 결혼이 성공이고, 이별이 실패이지 않다. 서로 사랑을 했느냐가 우선이며,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중요하다.
최문선은 화가다. 아버지는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암살되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죽자, 그는 한 목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최문선은 우연히 바다에 빠진 한 여인을 구해준다. 이 여인은 서울에서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에어걸’ 인순이다. 그녀는 문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지만 문선은 인순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없다. 어느 날 문선은 그림을 그리다 어렸을 때 이웃에 살던 윤명희 가족을 15년 만에 만나고, 명희의 오빠 명근의 부탁으로 잡지사 일을 돕기 위해 서울로 간다. 문선과 명희는 서로 사랑에 빠지고 장래를 약속한다. 인순은 서울에서 우연히 문선을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문선은 인순의 사랑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문선과 함께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유부남 황인수는 명희와 인순에게 관심을 갖고 치근거린다. 명희와 문선이 약혼하는 날 인순은 꼭 할 말이 있다고 문선을 부르고, 문선이 오기 전 인수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순을 죽인다. 그리고 인수는 인순의 집에 들어서는 문선에게 흉기를 휘둘러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기절한 그의 손에 칼을 쥐어준 뒤 도망친다. 눈이 먼 채 누명을 쓰게 된 문선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다. 인수는 문선의 인격에 감동해 자백하고, 문선은 무죄로 풀려난 뒤 인순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탄다.
이 영화는 박계주의 첫 장편소설 ‘순애보’가 원작이다. 영화는 문선이 탄 기차를 쫓아가며 눈물짓는 인순의 모습으로 끝나지만 소설의 결말은 더 이어진다. 소설에서 명희는 문선의 행방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그가 함경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간다. 문선과 명희는 감격적인 재회를 하고 혼인한다. 문선은 명희를 모델로 ‘순애보’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한다.
이 영화에서 인순은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감정이나 애정표현을 머뭇거리지 않는 전후파여성 ‘아프레걸’을 상징한다. 그녀는 전통적인 여인상인 ‘명희’와 대조되면서 심리적 반감을 일으키는 대상, 순수한 사랑을 방해하는 훼방꾼,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여성, 무분별한 격정의 소유자로 비친다. 박계주 작가의 의도가 읽히는 설정이다.
<순애보>는 1958년 우수국산영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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