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젊은 혈기는 자신도 모르게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만들지만 책임이 따르는 것을 알게 되면 대개 자유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어리석어서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어긋난 행동을 할 뿐이다.
영화 <자유부인>은 성욕을 참지 못한 대학교수의 부인의 이야기다. 안락한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기력을 핑계로 남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여인의 파멸을 그려낸다. 진정한 자유는 지성적이고, 훈련된 사랑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유혹에 이끌려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남편과 아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 쾌락만 좇다 정작 소중한 사람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현대인에게도 경종이 되는 이야기다.
누구나 감성의 만족과 욕망의 충족을 기대한다. 권세와 부귀명화, 환락을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에 물들지 않은 것은 사람답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권모와 술수보다는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정도를 넘지 않게 절제하며 일상을 다스리는 것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생활 철학일 것이다.
<자유부인>은 그야말로 말 많던 영화였다. 이 영화는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원작이다. 당시 이 소설은 언론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 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엘리트층 부인의 일탈은 남성 지식인들에게 ‘못 배우고 천한 집안의 난잡한 일상이지 자기 집안과는 다르다’며 분노의 대상이 됐다. 또 대학교수 부인과 젊은 남자의 춤바람이나 그녀와 양품점 한태석 사장의 포옹, 젊은 대학생 신춘호와의 키스 등은 당시 대중예술에서 수용하기 힘든 내용과 표현 수위였다. 때문에 이 영화는 문교부 검열실에 의해 30미터 이상의 필름을 삭제당한 뒤 개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부인>은 지식인층의 위선과 허위를 까발리는 동시에 수위 높은 성적인 묘사로 대중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후 한국사회는 ‘계바람’, ‘춤바람’, ‘사치바람’으로 발칵 뒤집어졌고, 정비석은 이를 소재로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총 21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소설을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서울신문의 판매 부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후문이다. 또 이 소설은 단행본으로도 출간돼 그 당시 7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영화로도 제작돼 1956년 1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하며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대학교수 장태윤과 오선영은 아들 경수와 함께 단란하게 살았다. 오선영은 우연히 길에서 만난 동창 최윤주와 함께 어울리면서 댄스파티에 참가한다. 최윤주는 친구들과 곗돈을 모아 밀수품 사업을 시작하고, 오선영은 옆집에 살던 대학생 신춘호에게 호감을 갖고 그에게 춤을 배운다. 장태윤 교수는 한글을 가르쳐주며 만난 미스박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별을 택한다. 양품점 한태석 사장은 오선영에 흑심을 품고 접근해 관계를 맺고, 상처 입은 한태석 사장의 아내는 장태윤 교수에게 익명의 편지를 써 오선영의 타락을 폭로한다. 오선영은 한태석 사장과 호텔에서 포옹을 하다 갑자기 나타난 한 사장의 아내에게 뺨을 맞고 거리로 내쫓긴다. 선영은 잘못을 뉘우치고 집에 돌아오지만 장 교수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장 교수는 오선영에게 “허영에 빠져서 가정을 저버리고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향락으로 바꾼 당신이 무슨 면목으로 돌아왔소. 만약에 한 조각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거든 깨끗이 여기에서 물러나시오. 그것이 경수에 대한 어머니의 도리가 아니겠소.” 그러나 아들 경수가 “엄마”를 외치며 문 열어 달라고 눈물을 흘리자 장 교수는 문을 열어주고, 경수는 오선영에게 달려가 엄마에게 안긴다. 한편 유명인사의 부인이었던 최윤주는 애인 백광진이 사기죄로 경찰서에 입건되면서 함께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그동안의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한다.
영화 <자유부인>은 각종 유행어를 만들었다. 극중 사기꾼으로 등장하는 백광진은 “뭐든지 최고급으로 주십시오”, “최고급입니까”라는 대사로 시중에 ‘최고급’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이 영화는 또 유명 인사들의 출연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가수 백설희는 여 주인공 오선영의 동창회의 일원으로 출연해 노래 ‘아벡크 토요일’을 부르고, 선영이 춤추던 댄스홀 장면에서는 당시 최고 댄서로 불리던 나복희가, 최고 밴드인 ‘박주근과 그의 악단’의 맘보 음악에 맞춰 관능적인 춤을 춘다.
낭만적이고 강렬한 OST는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사치에 찌든 엘리트층 부인들의 대사도 무척 찰지다. “혜숙이가 낀 다이아반지 좀 봐. 한 세 캐럿은 될 거야.”, “영란인 진짜 목걸이를 걸었어.” “바깥어른이요. 바깥어른 걱정은 왜 하세요. 배짱이 두둑한지 알았더니 사고방식이 섬세하시군요.”
이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크레인과 이동차를 처음으로 사용한 영화로 유명하다. 이 영화의 제작사의 동업자 중 한 명이 청계천에서 기계를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형모 감독이 직접 그린 모형을 바탕으로 이동차와 크레인을 만들었고, 이동차에는 미군부대에서 공수한 헬리콥터 바퀴 4개가 동원해 달았다.
<자유부인>은 이후 여러 편의 속편과 리메이크로 진화됐다. 이듬해 김화랑 감독은 <자유부인 속편>을 만들었고, 1969년 강대진 감독은 <자유부인>을 리메이크해 발표했다. 1981년과 1986년에는 박호태 감독이 <자유부인1>과 <자유부인2>을, 1990년에는 박재호 감독이 <1990 자유부인>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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