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이 높다고 인격이 높지 않다. 많이 배웠다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권력 찬탈을 위해 암투를 벌였다. 실권을 쥐기 위해 서로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고, 세도가에 달라붙어 과거의 은인을 저버리는 일도 흔했다.
조선 시대에는 천인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대접을 받았던 망나니가 있었다. 비록 망나니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태어난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고, 인간다움도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양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짐승이다.
조선 시대는 신분 제도라는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묶여 살던 때다. 그런 시대에도 사람의 양심과 정의는 운명보다 견고했다. 어떠한 고초에도 자신을 등지지 않고, 세상이 조롱하고 비웃어도 끝까지 인내하는 것은, 양심과 정의로 운명을 자신의 수중에 넣을 때다.
영화 <막난이비사(망나니비사)>는 조선 시대 비참하게 살았던 망나니의 삶으로 은혜의 소중함을 얘기한다. 망나니의 어머니는 어려웠을 때 한 양반가의 도움으로 아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먼 훗날 양반가가 역적으로 몰리자 망나니의 어머니는 목숨으로 그 은혜를 갚는다. 그녀가 은혜를 갚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보답을 바라지 않았던 양반가의 베풂에 있었다. 높은 위치에 있을 때 아랫사람을 보살피고 경멸하지 않은 복덕이겠다.
정치가 바르고 청백하면 민중의 삶도 편안하고 평화롭다. 하지만 정치가 문란하고, 사회가 혼란하면 그 아픔은 고스란히 민중에게 돌아간다. 이 영화의 배경은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 시절이다. 그때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카오스의 시대였고, 민중의 삶도 피폐했다.
언행이 강직한 정 진사는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의 딸 채는 쫓기는 몸이 된다. 아전 오가는 채를 자신의 첩으로 들이기 위해 그녀를 뒤쫓고, 채는 어렸을 때 자신의 집에서 일했던 유모의 집으로 피신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망나니 먹은 정진사의 목을 치고 집에 들어온다. 유모는 그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애기씨를 살려드려야겠다”고 말한다. 망나니를 사랑했던 여인 달은 역적의 딸 때문에 그가 위기에 처할 것을 염려해 관가에 알리고, 포졸들이 채를 잡기 위해 집에 들이닥친다. 채를 보호하려다 망나니의 어머니는 죽고, 망나니는 분노한 나머지 달을 죽인 뒤 참수를 당한다. 채는 홀로 살아남아 마을을 빠져나간다.
1955년에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반공 사상을 전파하는 영화들이 속속 발표됐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면을 부각한 <자유전선>, <불사조의 언덕>, <피아골> 등이 그 예다. 그런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개봉됐다. 영화 <막난이비사>다.
망나니는 사형수의 목을 베던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유교 국가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하려고 했다. 그래서 관리들은 천인이나 중죄인 가운데 망나니를 뽑아 강제로 칼을 들게 했다. 망나니는 1896년 참형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있었다. 지금은 언행이 좋지 않거나 성질이 못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달을 연기한 배우 노경희는 제1회 금룡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노경희는 약초가극단에서 노래하는 배우로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1950년 <흥부와 놀부>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후 <피아골>에서 개성 강한 빨치산 여성대원역을 맡아 ‘최고 수준에 달한 연기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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