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랑은 끝없이 용서하고, 없던 용기까지 내도록 만들며,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사랑 때문에 미소 지을 수 있다.
영화 <운명의 손>에서 여 주인공 마가렛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소명마저 망각한다. 그녀는 북조선을 위해 남조선의 정보를 빼내는 스파이였지만, 한 남자를 만난 뒤 모든 이성과 지성을 넘어선 사랑을 보여준다.
마가렛의 사랑은 무엇보다 우선했다. 사랑으로 이뤄진 그녀의 모든 행위는 선악을 초월했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지켜냈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사랑은 전쟁 중 조국을 배반한 행위였다. 그녀의 사랑을 미친 짓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마가렛은 용감했다.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끄집어냈다. 겁쟁이는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 사랑을 하면서 뒤따르는 수많은 책무와 자기반성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저는 불순한 여자예요. 천한 여자예요. 저는 선생님께 사랑받을 자격은 없을지 몰라도 그러나 선생님을 사랑할 수는 있어요.”
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을 바치는 마가렛을 보면서 저절로 마음이 뜨거워진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을까. 요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순애보, 위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남녀의 사랑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뤄지지 않는 두 남녀의 사랑은 남과 북이 갈라진 현실과 중첩된다.
마가렛은 북조선 스파이다. 우연히 도둑으로 몰린 고학생 신영철을 구하고, 그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푼다. 하지만 그녀는 북조선 스파이로서의 정체성과 신영철과의 사랑 사이에서 번민한다. 시간이 흘러 신영철은 스파이를 잡는 방첩대 대위가 되고, 남파된 간첩이 한 여인과 접선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총격전까지 벌이지만,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조직의 위협을 느낀 스파이 두목은 마가렛으로 신영철을 유인해 죽이는 계획을 세우고, 신영철은 마가렛의 정체를 알게 돼 배신감을 느끼지만 사랑을 위해 죽을 결심을 한다. 그러나 마가렛은 신영철을 쏘지 못하고, 오히려 두목의 총에서 신영철을 구한다. 신영철은 두목을 결투 끝에 죽이고, 총에 맞은 마가렛이 자신의 총에 맞아 죽기를 원하자 눈물을 흘리며 방아쇠를 당긴다.
<운명의 손>은 세 사람의 손을 클로즈업하면서 시작된다. 카메라는 누구의 손일지 잔뜩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뒤 곧바로 대사 없이 롱테이크 기법으로 마가렛의 방을 잡는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들이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색다른 몰입도를 선사한다. 1954년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촬영기법이다. 역시나 이 영화를 연출한 한형모 감독은 촬영감독 출신이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물을 기반으로 하지만 큰 뿌리는 두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다. 두 사람은 끝내 엇갈린 운명에 내몰리지만 종국에는 서로를 용서한다.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며, 용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것을 그대로 입증한다.
이 영화를 보내 내내 가슴이 짠하고 애달팠다. 순수한 사랑이 분단의 벽 앞에 끙끙 앓는 상상이 계속돼서다. 이 영화의 고갱이는 두 남녀의 사랑과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의 아픔이다. 분단은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의 시련이다. 조국의 분단으로 많은 사람들은 가족과 결별했고, 강대국이 주입시킨 냉전 논리는 서로 총칼을 겨누게 만들었다. 신영철은 마가렛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삼팔선은 왜 생겼는지. 뜻하지 않은 삼팔선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가능한 우리들의 손으로 이 장벽을 뚫고 나가야 하오.”
<운명의 손>은 한국 영화 최초로 키스신이 삽입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영철은 마가렛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고, 마가렛은 환한 미소로 죽음을 맞는다. 두 사람의 연기는 실제 연인처럼 느껴져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사랑은 분단의 비극을 경험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순간의 감격을 선사했다. 남과 북이 뜨겁게 만나는 순간의 희열을.
'이야기 + > 초창기 한국영화30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망인 - 전쟁이 남긴 아프레걸의 욕망, 박남옥 감독 1955년작 (0) | 2022.07.30 |
---|---|
양산도 - 지배계급의 부도덕과 가학성, 김기영 감독 1955년작 (0) | 2022.07.30 |
마음의 고향 - 마음이 이끄는 삶 그대로, 윤용규 감독 1949년작 (0) | 2022.07.30 |
자유만세 - 독립운동가들의 투지와 신념, 최인규 감독 1946년작 (0) | 2022.07.29 |
반도의 봄 - 일제 말기 조선 영화계의 현실, 이병일 감독 1941년작 (0) | 2021.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