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을 파괴한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말살한다. 전쟁은 위대한 영웅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 붉은 피가 자리한다. 1950년 이 땅에서 벌어진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미망인>은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을 그린다. 미망인은 남편이 죽고 나자 먹고사는 일이 막막하다. 아직 젊음도 창창해 성적 욕구 또한 강하다. 미망인은 서서히 변화한다. 깨끗하고 순수했던 그녀는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열락에 매달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그동안 정숙하고 순결하며 순종적이고 헌신적으로 묘사됐던 전통적인 여성상과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정서나 현실적인 어려움을 주저 없이 드러내고, 모성성까지 철저하게 부인하면서 남성과 안락을 욕망한다. 일명 ‘아프레걸’이다.
영화를 보면 1950년대, 딸을 내팽길 정도로 자신의 안녕과 쾌락에 치중한 여성상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미망인의 배면에는 전쟁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다. 인간성마저 철저하게 빼앗기고 짓밟힌 여성들의 통증과 반흔이다. 전쟁은 인간을 짐승보다 못한 생명체로 만든다. 짐승은 생존을 위해 살육하고, 같은 종족끼리는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같은 종족을 죽인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거대한 욕망의 표출이자, 인간만이 벌이는 참혹한 비화다. 이 고난을 겪으면 인간은 어떻게든 변하게 돼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박남옥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할 때 딸을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장에 아이를 등에 업고 연출했다. 또 제작비 부족으로 스태프들에게 직접 밥을 해먹이며 영화를 찍었다. 현재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유실돼 결말은 확인하기 어렵다.
여성 감독의 관점에서 ‘아프레걸’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 새롭고 담담하다. 당시 남성 감독들은 대부분 아프레걸에 대해 허영에 들뜨고 쾌락에 치중하는 여자, 비도적적인 악녀, ‘양갈보’나 다방 마담 등의 직업을 가진 타락한 여자로 그렸다. 그러나 박남옥 감독은 아프레걸을 나쁘거나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격식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대신 한국전쟁 후 열악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차분하게 담아낸다.
한국 전쟁 이후 문화예술계에서는 아프레걸이라는 용어가 두드러지게 사용됐다. 아프레걸은 처음 최태응 작가가 소설 <전후파>에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남녀를 ‘아푸레게르’로 지칭하던 것에서 유래됐으며,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실낙원>, <백조흑조> 등의 소설에 ‘아프레걸’이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딸과 피난생활을 하는 미망인은 한국전쟁 때 죽은 남편의 친구인 이성진 사장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 사장의 도의심은 애정으로 변한다. 이 사장의 아내는 남편의 변심을 눈치채고 자신도 젊은 남자를 만나면서 히스테리를 푼다. 하지만 젊은 남자는 익사할 위기에 처한 미망인의 딸을 구해주고, 미망인과 사랑에 빠진다. 미망인은 그와 동거하기 위해 딸을 다른 집에 맡긴다. 어느 날 젊은 남자는 한국전쟁 때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나타나자 미망인을 떠난다. 그녀는 젊은 남자를 잊지 못하고 그를 원망한다. (필름이 유실돼 볼 수는 없지만) 미망인은 끝내 젊은 남자를 향해 칼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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