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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도 - 지배계급의 부도덕과 가학성, 김기영 감독 1955년작

이동권 2022. 7. 30. 11:34

양산도의 한 장면, 옥랑과 수동 ⓒ한국영상자료원

 

욕망의 끝은 파멸이다. 자신의 희구만을 채우는 욕망은 불행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바라던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탐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사람의 욕망은 내버려 두면 한도 끝도 없고, 작은 충격조차 견딜 수 없이 추락한 뒤에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굳이 방법을 찾는다면 스스로 자신을 개조하는 것뿐이다. 욕망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욕망의 양상이 어떠하냐는 게 중요하다. 심성이 그릇될 때는 욕망에 조정을 당하지만 심성이 올바를 때는 욕망을 조정할 수 있다.

영화 <양산도>는 절제하지 못한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준다.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도령의 야만적인 만행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들의 부도덕함과 가학성을 여과 없이 까발리면서 조선 시대 민중의 참혹했던 현실을 투영한다. 이를 테면 아들을 결혼시킬 돈이 없어 스스로 노비가 된 농민과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양반, 애틋한 사랑마저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농민의 자식과 죄의식 없이 농민의 딸을 농락하는 양반의 아들이 교차되면서 혀를 차게 만든다.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는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었고, 양인은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분류됐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통칭하는 말로, 조선 시대 최고 지배층의 특권을 누렸다. 중인은 양반층 밑에서 행정실무를 맡았고, 상민은 우리가 백성으로 부르는 일반 민중이었다. 이들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면서 전세, 역, 공납의 의무를 졌지만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악행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 영화는 권력과 재력에 짓눌려 살아갔던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담아낸다. 천인은 노비나 백정, 광대 등이었으며,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돼 매매 혹은 상속, 증여됐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세습됐다.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질러도 죽을 때까지 양반으로 살았다. 신분제 세습은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법제다. 재주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고, 사람 됨됨이가 부족해도 부모만 잘 만나면 막강한 권력과 재물을 물려받아 떵떵거리며 살았다. 같은 이유로 조선 시대에 가장 비통한 삶은 가난한 민중이 아니었다. 대대로 대물림되며 억압과 속박에 얽매였던 천인, 노비의 삶이었다.

 

양산도의 한 장면, 수동의 어머니 ⓒ한국영상자료원
탈춤 추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수동과 옥랑은 혼인을 약속한 사이다. 이들 사이에 한양에서 돌아온 김 진사의 아들 무령이 낀다. 무령은 성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옥랑을 소유하려 한다. 겁탈도 불사한다. 겁먹은 수동과 옥랑은 부모와 함께 들판에서 몰래 혼인을 올리고, 마을을 떠나 도망친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하루 만에 김 진사의 하인들에게 붙잡히고, 도망가는 과정에서 수동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다. 옥랑의 아버지는 잡혀 끌려오는 옥랑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해 실수로 김 진사의 하인 한 명을 죽인다. 무령은 아버지의 살인죄를 덮어주는 대가로 옥랑과의 혼인을 요구하고, 옥랑은 혼인을 허락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동은 옥랑을 찾아가 설득하지만 옥랑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수동의 청을 거절한다. 실의에 빠진 수동은 스스로 목을 매고, 수동의 어머니와 외삼촌은 수동의 시체를 옥랑의 혼인 행차 길가에 묻는다. 옥랑의 혼인 행차가 무덤 옆을 지나갈 무렵 혼인 행차 일행의 발은 땅에 붙어 움직이질 않고, 수동의 어머니는 가마에서 내리는 옥랑을 칼로 찌른다. 옥랑은 수동의 무덤가로 기어가 죽는다.

수동의 어머니 때문에 눈물을 질금거렸다.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미의 마음이 느껴져 한없이 슬픔이 복받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애통해 울부짖는 배우 고선애의 연기는 신들린 게 맞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수동의 어머니가 옥랑을 죽이는 장면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일반적인 정서로 보면, 수동의 어머니가 아들을 죽게 만든 무령을 죽이는 것이 복수다. 하지만 수동의 어머니는 옥랑을 죽여 아들 수동과 저승에서 만나게 한다.

김기영 감독의 의도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유실된 상태여서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대신 김기영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대해 두 남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사후에 사랑을 이룬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기묘한 결말과 함께 어우러진 양산도 민요와 탈춤도 특별했다. 탈춤을 추는 사람들이 전통 탈이 아니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수한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다. 이 또한 사후 세계를 암시하는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