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초창기 한국영화30선

마음의 고향 - 마음이 이끄는 삶 그대로, 윤용규 감독 1949년작

이동권 2022. 7. 30. 11:28

마음의 고향, 도성이 절을 떠나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사람마다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무욕의 마음으로 청빈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살던지 별반 다르지 않다며 이리저리 방랑하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자신의 나약함으로 돌려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사람도 있다.

뭐든 관계없다. 삶의 방향성을 외부의 영향으로 돌리지만 않으면 된다.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은 자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연속되는 것이 삶이지만 어떻게 살겠다는 신념만 확실하다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면 됐고, 어떤 결과를 낳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마음의 고향>의 주인공 도성도 모든 억압을 끊어내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12살 동자승인 도성은 자신을 버린 어미를 찾고 싶은 순수한 소망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세상을 향해 떠난다. 주지 스님과도, 서울에서 온 부잣집 미망인과도, 산에 사는 사람과도 모두 결별하고 속세로 나간다. 영화를 보면서 생긴 답답한 마음이 이 순간 해소된다.

 

최은희 ⓒ한국영상자료원
마음의 고향, 최은희와 도성의 대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도성은 엄마에게 버려져 절에 들어온 뒤 먼 친척인 주지 스님의 손에 자란다. 도성은 절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수양에 전념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엄마가 매일 그립다. 어느 날 절에 도성 또래의 자식을 잃은 미망인이 방문한다. 도성은 그녀를 보고 엄마와 같은 정을 느끼고, 미망인도 도성을 친자식처럼 여긴다. 그러던 중 도성이 엄마가 나타나 주지스님에게 도성을 내어달라고 하지만 주지스님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고 도성을 미망인의 수양아들로 보낼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도성이 엄마를 만나면 깃털 부채를 만들어주기 위해 비둘기를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지스님은 도성을 수양아들로 보내지 않는다. 이후 도성은 엄마가 절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를 찾아 홀로 절을 떠난다.

도성이 홀로 길을 나선 이유는 주지스님의 역성이 한몫했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과거의 업보와 교리에 얽매어 도성을 속박했다. 도성은 스스로 구도자가 되겠다고 원한 적이 없었다. 오직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산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하지만 주지스님은 비둘기를 구실로 도성의 언행을 질책하며 앞길을 막아버렸다.

모든 문화예술과 같이 종교의 구심점도 인간에 있어야 한다. 생명을 사랑하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고 행복으로 이끄는 대자대비 마음이 우선이다. 하지만 주지스님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도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고, 엄마가 진 악업을 도성이 치르길 강요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을 보면 도성은 비구니와 사냥꾼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로, 주지스님이 삼밭에 버려진 아이를 주워 기른 것으로 돼 있다.)

무엇보다 도성이 절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주체적인 선택이 컸다. 도성은 절에서의 모든 안정과 평온을 물리치고 자신의 내부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과감하게 결단했다. 자신의 내부와 싸우고,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만큼 삶에서 힘겨운 투쟁은 없다. 가능하다고 믿고 행하면 언제든 그것에 가깝게 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도성은 이 영화의 원작 소설 <동승>을 쓴 고 함세덕 선생의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함 선생은 일제 말기에 친일 작품을 쓰다 광복 후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좌익극운동에 가담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작품을 발표했으며, 계급투쟁 관점에서 <고목>이라는 작품을 쓴 뒤 월북했다.

이 영화에서 미망인의 역할은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불리는 최은희가 맡았다. 젊은 시절의 최은희는 활짝 핀 꽃에 비유될 만큼 절세미인의 자태로 어딘지 투박해 보이는 스크린을 꽉 채웠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평화롭다. 크게 소리를 내면 안 될 정도로 조용하게 꿈틀거린다. 빠르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기 충분한 영화다. 또 이 작품은 1949년 당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정서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배경, 사상, 설정, 음악, 대사 모두 불교적이라서 불교영화라고 불릴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불교영화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 영화는 인간의 원초적 속성과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불교적 색채를 차용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