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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봄 - 일제 말기 조선 영화계의 현실, 이병일 감독 1941년작

이동권 2021. 11. 15. 01:54

1940년대 초 영화촬영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사랑은 어떻게 배우게 될까? 사랑은 부모나 형제, 친구나 선생 같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체화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직접 사랑을 해야만 배울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도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삶은 오로지 타인을 위한 것에서만 빛을 발한다.

영화 <반도의 꿈>은 조선시대 영화 제작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사랑의 의미 또한 진중하게 묻는다. 영화 속 사랑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로맨스지만 서로 지켜주고 존중하는 사랑 앞에 일방적인 한 여성의 짝사랑은 논외로 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선택이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이해와 방향성이라는 얘기다.

<반도의 꿈>은 일제가 식민지 말기 조선 민중을 선동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친일영화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대사에는 일본어가 수두룩하다. 근사한 배경음악도 일본인이 작곡했으며, 망해가는 조선 영화인들을 돕는 선인도 일본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 영화인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제의 조선영화 지배 정책은 1937년 만주영화법이 통과되면서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전에는 영화검열을 통한 소극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만주국의 영화를 통폐합하고, 1939년 일본영화령을 공포하면서 일본은 조선 영화 통제에 박차를 가했다.

일제는 어용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를 결성하고 통제체제의 발판을 마련한 뒤 1940년 조선영화령을 공표한다. 조선영화령의 주요 내용은 영화사업 등록제, 외국영화 수입 제한, 문화영화 강제상영, 대본 사전검열, 영화사업과 종업자 등록제 등이다. 그리고 이 조선영화령은 미군정기, 유신, 군사독재 시절의 사전 검열과 영화사 허가제 등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제가 조선 영화를 강제했지만 조선 영화인들은 일제의 강제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조선영화령이 시행되면서 조선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가 일제로 넘어갔다. 그러나 영화사가 모두 대기업이 되면서 영화인들은 생활의 안정을 찾았고, 영화인으로서 기득권과 화려한 생활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도의 봄의 한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여주인공 김정희가 노래부르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반도의 꿈>은 영화 ‘춘향전’을 제작하는 과정을 담은 극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영일은 서울에서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다. 그는 친구의 동생이자 영화배우 지망생인 김정희를 소개받는다. 김정희는 평양 출신 신여성으로, 그 당시 우리나라가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하나의 나라’라는 감회에 젖게 한다. 하지만 캐스팅이 이미 끝난 뒤라 김정희를 레코드사에 소개해준다. 한편 ‘춘향전’의 여주인공 안나는 이영일에게 호감을 보이고, 대표적인 친일인물인 레코드사 문예부장은 김정희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이영일과 김정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암묵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춘향전’을 제작하던 이영일과 감독 허훈은 안나가 촬영장에서 말썽을 부리자 그녀를 내치고 김정희를 춘향으로 기용한다. 하지만 제작비 난항으로 공금에 손을 대 감옥에 가고, 이영일은 안나의 도움으로 풀려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고 건강을 되찾는다. 영화 ‘춘향전’은 일제가 세운 ‘반도영화주식회사’의 도움으로 완성돼 대성공을 거둔다. 김정희는 영화 개봉을 축하하는 자리에 이영일과 안나가 함께 나타나자 충격을 받고 펑펑 울지만 그에 대한 믿음으로 오해를 풀고, 두 사람은 일본 영화계를 보고 배우기 위해 떠난다.

이 영화는 일제 말기 영화제작 과정과 조선 영화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편집과 촬영, 장면 전환 등은 지금 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됐다. 음악을 이용해 작품의 심도를 높여준 점도 무척 괜찮았다. 일제가 이 영화 제작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일제 식민지 시절에 제작된 영화 중에서 기술적으로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김정희가 이영일과 안나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린 뒤 홀로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노랫말이 매우 시적이고, 아름다워 붙여본다.

꽃다발 걸어 주던 달빛 푸른 파지장. 떠나가는 가슴에 희망초 핀다.
소라는 울어도 나는야 웃는다. 오월 달 수평선에 꽃구름이 곱구나.
물길에 우는 새야 네 이름이 무어냐. 뱃머리에 매달린 테이프가 곱구나.
고동은 울어도 나는야 웃는다. 그믐달 수평선에 파랑새가 정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