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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만세 - 독립운동가들의 투지와 신념, 최인규 감독 1946년작

이동권 2022. 7. 29. 16:45

남부의 총에 맞은 최한중과 미향ⓒ한국영상자료원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산다. 하지만 누구나 신념대로 살지 못한다. 용기와 의지가 뒤따르지 않아서다. 머릿속에만 가득 찬 신념은 헛말과 상처만 부른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신념을 지키고, 그것을 행동으로 이뤄낼 때 가치가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그러했다.

 

안중근, 윤봉길, 안창호 같은 독립 운동가들이 생각나는 영화다. 오직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 살고 죽었던 이들의 용기와 의지가 영화 <자유만세>에서 감지된다. 누구나 목숨을 부지하며 태평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투쟁했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 때문이겠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모여 조선은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터무니없는 부조리와 온갖 악덕이 활개를 쳤다. 국가 정책은 사실상 식민지 지배정책을 답습했다. ‘황국신민의 서사’와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졌고,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한 반상회나 치안유지에 관한 여러 법들이 제정됐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은 식민지 지배구조의 재현이었으며,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였다.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현재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매우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독립운동가 자손이 방송에 소개될 정도다. 만약 독립 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지하조직 은신처 ⓒ한국영상자료원
무장봉기를 논의하는 독립운동가들 ⓒ한국영상자료원

 

1945년 여름. <자유만세>의 주인공 최한중은 조선의 독립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기 위해 무장봉기를 준비한다. 주위 지식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혁명이란 무모한 희생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것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 폭동을 일으켜 동지들의 귀중한 목숨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최한중의 생각은 달랐다. 타의에 의한 독립은 조선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또 당시 일제의 식민 수탈이 최고조에 달해 민중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예 없을 정도로 전 국토를 악랄하게 핍박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의 최우선 과제는 항복 전 독립 쟁취였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식민지 권력과 결탁한 매판자본을 제한적으로 육성하고 조선 민중의 수탈구조를 체계화했다. 또 사회관계를 학연, 지연, 혈연 단위로 분산해 분리 지배했으며, 문화적으로는 감상적 허무주의 정서를 조장해 사회 비판의식을 마비시켰다.

 

일제는 조선 민중을 침략전쟁에도 동원했다. 만주 지배 등에 첨병으로 악용해 아류 제국주의의 망상에 빠지게 하면서 침략 피해국들의 민족적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마지막에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해 아예 민족의 언어와 문화 나아가 민족 자체의 말살을 기도했다.

 

<자유만세>의 주인공 최한중은 일제의 앞잡이였던 남부의 배반으로 체포돼 감옥에 있던 중 극적으로 탈출하고 친구가 소개해준 은신처, 혜자의 집에 들어간다. 혜자는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해 애쓰는 최한중의 모습을 보고 사모하게 된다. 최한중의 지하조직은 무장봉기를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던 동지가 일본 헌병에 잡히고 만다. 최한중은 그를 구출한 뒤 쫓기다 남부의 애인 미향의 아파트로 피신한다. 미향은 비록 자신이 일제의 앞잡이의 애인이지만 최한중의 항일 투지와 신념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되고, 지하조직이 있던 곳까지 찾아가 정보와 자금까지 전달한다. 하지만 미향은 남부와 헌병대에 발각돼 총에 맞아 죽고, 최한중도 총상으로 대학병원에 이송된다. 혜자는 최한중을 헌병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탈출시킨다.

 

이 영화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이들의 다양한 모습이 표출된다. 정성스럽게 태극기를 그리거나 다리미로 말끔하게 다리는 모습, 무장봉기를 위한 토론, 독립군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모습 등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활약상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해방의 감격에 젖어 있는 조선 민중은 이 영화에 열광했고, 1946년 십오만 명 관객 동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영화의 감독 최인규는 <수업료>, <집없는 천사>, <복지만리>, <망루의 결사대> 등 숱한 친일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해방 후 그는 자신의 업보를 씻어내듯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를 계속해서 발표한다. 그 첫 번째 영화가 바로 <자유만세>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의 일부 필름이 유실돼 정확한 결말은 알 수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결국 최한중은 총에 맞아 죽고, 최한중이 죽은 날은 광복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