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절망할 수 있는 것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끝없는 가난 앞에서 희망은 무력하다. 가난은 절망보다 더욱 비참한 현실로 삶을 이끈다. 1930년대 말, 일제와 부자, 지주들의 착취가 최고에 달했을 때 우리 민중이 그랬다. 민중은 무엇보다 희망을 먼저 빼앗겼고, 스스로 개나 소, 돼지 같은 삶을 인정토록 강요받았다.
영화 <어화>는 여 주인공 인순의 삶으로 당시 민중의 아픔을 은유했다. 인순은 평생 가난에 쫓기며 육체를 유린당했고, 끝내 자신의 삶을 포기해버렸다. 한때 인순에게는 짐승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서울에 가서 돈을 벌어 빚도 갚고, 공부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앞뒤가 모두 막혀 숨조차 쉴 수 없는 짐승 우리일 뿐이었다.
이 영화의 제목 ‘어화’는 고기잡이배에 켜놓은 등불을 말한다.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세면 ‘어화’는 흔들리며 꺼져버리곤 했다. 세상 풍파에 휩쓸려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해온 이 영화의 여 주인공과 그대로 닮은꼴이다.
어부 춘삼은 부잣집 장주사의 빚 독촉에 못 이겨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높은 풍랑을 맞아 불귀의 객이 됐다. 장주사는 빚 대신 춘삼의 딸 인순을 첩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인순에게는 사랑하는 남자 천석이 있었다. 하지만 인순은 끔찍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순은 장주사의 첩을 거절하고 서울에 올라가 돈을 벌 궁리를 한다. 동네 사람들은 인순이 서울에 가고 싶어 하자 한 마디 일갈한다. ‘서울 공장에 가더니 갈보로 팔리지 않았니.’ 장주사의 아들 철수는 인순에 흑심을 품고 아버지 빚을 갚으라며 인순을 데리고 서울로 가다. 인순은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철수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홀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한 나머지 기생이 된다. 천석은 기생이 됐다는 인순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하고, 인순을 결국 자살을 기도한다. 천석은 그런 인순을 위로한다. ‘사랑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야.’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단순하고 진부하다. 그러나 여주인공 인순의 삶은 한 여성의 삶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중의 삶을 함의한다. 그때 그 시절 민중은 가난했다. 가난이라고 다 같은 가난이 아니다. 가난은 불명예도 아니고 불행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가난의 원인이다. 나태하고 어리석어 가난을 자초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일제의 수탈과 부자들의 착취가 심했으며,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붓거나 돈보다는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스스로 가난을 택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 속 가난은 민족의 수난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영상은 아름답다. 그 옛날에도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음악과 서정적인 영상을 만들었다니 놀랍다. 이 영화는 어촌의 목가적인 풍경과 도시의 야수적인 정서가 어우러지며 심심치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또 적재적소에 배경음악을 깔아 영화의 심도를 높였다.
영화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시는 이 영화를 줄곧 관통하며 부족한 내러티브를 보완한다. 인순의 남자친구 천석은 인순이 샌님이라고 놀리자 이 시를 들려준다.
‘이제는 바라는 것조차 어지러워 간다. 삶이란 한때의 꿈이던가. 고요한 봄날 새벽 장미 망아지를 타고 달려가는 바람결이 아니던가. 흘러가는 너를 서러워도 않고 부르지도 않으며 또 울지도 않으니, 황금으로 물들인 저녁노을이 능금나무 가지에서 사라지듯 모두가 흘러간다. 젊은 날은 다시금 오지 않으리.’
검열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지만 아마도 천석은 독립운동을 했던 청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영화에서 천석은 진실로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더 많이 갖기 위해 욕망하는 사람이라고 일러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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