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 인도의 적나라한 빈곤과 구습을 이야기하다

이동권 2024. 9. 12. 15:14

수보드 굽타 ⓒ아라리오갤러리



인도가 보인다. 오랜 시간 동안 진보하고 거대화된 인도가 아니다. 경제성장과 서구화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곳에서 사는 인도인들의 일상이다.

삶의 가치가 물질로 판단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인간과 생명보다 돈과 이윤이 중요하고, 인간의 욕망까지도 조작하는 물질만능의 세상이다. 이러한 변화를 인도 또한 겪고 있다. 그러나 구습이 개혁되고, 봉건적 가풍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해도 인도의 자본주의는 힌두교와 카스트제도에 맞물려,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피폐하다. 

수보드 굽타(Subodh Gupta)는 인도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인도의 모든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 부엌용품이나 황동제 고물 식기와 힌두 문화를 반영하는 소 배설물이나 우유 같은 성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고, 인도인의 음식 문화에 녹아있는 정치, 종교,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끄집어내 봉건적 인습과 사고가 지배적인 인도를 암유한다.

수보드 굽타의 작품을 보면 가슴 끝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눈물도 난다. 인간의 슬픔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차별적인 신분제도 때문에 시원한 물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인도 경제가 아무리 발전했다지만, 낡은 습관과 고루한 사상은 형식상으로도 타파되지 않았고, 감정적으로도 용납되지 않고 있다.

수보드 굽타는 세계적인 아트스타의 반열에 오른 인도 출신의 작가다. 그의 작품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빠른 서구화라는 인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독창적이고 세련된 조형언어로 현대미술계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신성하다’는 그의 확고한 가치관이 국경을 초월한 시각언어로 인정받은 셈이다. 

 

힌두교와 카스트

수천 개의 헌 놋그릇과 요리 도구가 놓여 있다. 한때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담던 낡은 그릇들 위로 스무 개의 수도꼭지가 설치돼 있다. 이 수도꼭지에서 끊임없이 물이 콸콸 쏟아진다. 생명의 근원인 물조차 함부로 마실 수 없게 만든 인도 계급사회에 대한 서글픈 은유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굽타는 작품의 재료로 인도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을 사용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기존에 사용하던 질그릇이나 토기그릇은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 때문에 다른 사람(특히 낮은 계급의 사람)의 타액이 묻어 불결하다고 여긴 탓이다. 

수보드 굽타의 작품은 힌두 문화와 관련이 깊다. 수보드 굽타가 태어나고 자란 인도는 전 국민의 90% 이상이 4억 개의 신을 믿으며 사는 나라이다. 하지만 전체 종교의 83%를 힌두교가 차지한다. 인도인들 대부분 힌두교리가 반영된 문화와 풍습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겠다. 

힌두교의 기본 교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정(淨)과 부정(不淨)의 논리로 나는다. 이 교리가 카스트 제도와 만나 인도의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을 형성했다. ‘부정한 것은 쉽게 오염된다’는 힌두교의 명제는 ‘정결한 정도’에 따라 사람을 등급별로 나누었고, 계급의 이동과 상승을 막는 상류층의 권위보호 장치로 작용했다. 

인도인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식음료인 우유와 물에도 계급에 따른 엄격한 차별이 존재한다. 카스트에 속하지 못한 불가촉천민들은 공동우물을 사용하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그래서 그는 마실 물조차 계급에 따라 결정돼 있던 사회를 은유하기 위해 물과 관련된 이미지를 끊임없이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수보드 굽타, Round the Corner, 2011-13,낡은 식기, 파이프, 수도꼭지, 펌프, 물, 가변크기(약 4 x 4m) ⓒ아라리오갤러리

 

수보드 굽타, Round the Corner 일부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먹다 남은 음식이 담긴 접시와 누군가의 입에서 딸려나온 부산물이 말라붙어 있는 포크 등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포만감에 차서 이제는 먹지 못할 음식찌꺼기들을 내려다보는 권위적인 시선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들은 금장을 두른 고풍스러운 액자 속에서 묘한 성스러움을 뿜어낸다. 

수보드 굽타의 그림은 19세기 말부터 백 년 동안 인도를 지배한 영국인들의 식문화를 연상시키는 식탁의 풍경이다. 이 그림은 인도인으로 자라며 겪어온 경험과 만나며 전통과 현대, 지배와 피지배, 정과 부정, 신성함과 그것의 침범 등이 교차하는 복잡 다단한 역사, 문화, 종교의 층위를 만들어 낸다. 

그림은 굽타의 유년시절 기억에서 파생됐다. 그는 가장 범죄율이 높고 가난한 동네인 동인도의 비하르(Bihar)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기억 속에 부엌은 가장 따뜻하고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타의 인도 어머니들이 그렇듯 남편과 아들이 식사 후 먹다 남은 음식을 부엌에서 먹었다. 어린아이였던 그는 음식 찌꺼기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첨가해 순식간에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내던 어머니와의 식사도 즐겨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인도에서는 ‘남은 음식’을 매우 부정한 것으로 여겨왔다. 힌두인은 생명과 관계된 것을 정결한 것, 생명에서 떨어져 나온 것(시체, 가죽, 분비물 등)은 부정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남겨진 음식은 생명을 잃은 음식, 즉 부정한 것에 속한다. 여성도 남성보다 부정한 존재로 여겨지므로, 대다수의 인도 여성은 남성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그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이러한 유년시절을 보낸 굽타는 예술의 소재가 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인도의 문화와 자신의 기억을 예술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수보드 굽타, 2013, Untitled, oil on canvas, 30x45x0.5cm ⓒ아라리오갤러리


수보드 굽타는 영국 정통클래식 바이크사인 로열 엔필드(Royal Enfields)의 가장 오래된 제품인 불렛(Bullet)을 브론즈로 캐스팅한 뒤, 크롬으로 정교하게 도금한 우유병들을 매달아 놓았다. 물과 우유를 가득 싣고 양쪽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뒤뚱거리며 매캐한 인도의 도심을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아라리오갤러리 전시장에 갖다 놓았다. 

화려한 경제발전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다수의 인도인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에 대한 경외의 시선이다. 

로열 엔필드는 19세기 후반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기에 설립돼 2차 대전 이후 인도 육군과 경찰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모터사이클 회사다. 로열 엔필드는 인도에 공장을 짓고 운영하다 영국 경제의 하락과 함께 인도 자회사에 매각됐다. 이후 오토바이가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발전했고, 오토바이를 영국으로 역수출까지 하게 됐다. 

수보드 굽타는 ‘음식’이 이동하는 수단과 그에 따른 문화의 전도현상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도시락 통을 자전거에 싣고 출근하는 아버지와 갠지스 강물을 양동이에 담아 들고 오던 어머니, 우유병을 잔뜩 싣고 거리를 돌아다니던 릭샤꾼은 작가의 유년시절 기억일 뿐 아니라 지금도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수보드 굽타, Two Mechanized Cows, 2014, 로얄 엔필드 브론즈 캐스팅, 실제 크기 ⓒ아라리오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