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이희명 - 예술가의 고독과 전투를 보다

이동권 2024. 6. 28. 17:32

이희명, 모호한 시작, 130x162cm, 캔버스 위에 과슈, 아크릴, 2012


공포스럽고 흉측하다. 현실의 평온을 갉아먹는 여러 군상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희명 화가의 그림에서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이나 충격적인 퍼포먼스들이 연상됐다. 이름만 들어도 뒷목이 오싹해지는 크리스 쿡시, 블라디미르 쿠쉬, 에두아르도 나렌조 같은 작가들도 생각나고 몽환적인 레메디오스 바로,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같은 작가들도 떠오른다. 이런 풍의 작품들을 보면 그치지 않고 편두통이 인다. 몽상이 부른 정신적인 피곤함 때문이다. 불안이나 초조와는 다르다. 원인불명이다.

이희명 화가의 작품은 어둠이 순식간에 눈동자를 수축시키는 것처럼 눈두덩을 끝없이 짓누른다. 여러 개의 눈과 검은 피부, 치아만 보이는 얼굴, 닭다리처럼 잘린 손가락 등 기괴한 신체와 물체들이 잠자리마저 괴롭힐 것처럼 강렬하게 각인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강렬함 뒤에는 슬픔이 엿보인다. 차가운 현실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고독, 아니 예술가로 살아가는 척박한 삶이 느껴진다.

 

이희명, 밝혀지지 않은 얼굴, 91x117cm, 종이 위에 오일, 아크릴, 2012


이희명 화가는 예술가다. 재화나 명성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가치가 그렇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그가 매우 자신만만하다는 것을 느낀다. 예술가의 덧없음과 무상함까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풍요로운 미래보다는 결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행복을 내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팬으로서 이희명 작가의 작품이 좋다.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설치작품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던 전시 ‘변형식물’ 때도 그러했고, ‘목구멍 사이로 추락한 달’도 마찬가지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 보이는 ‘어두움’은 아름다운 피곤이다. 하얀 것처럼 식상하고 지루한 것은 없다. 특히 현실을 가식적으로 표현할 때는 침울해진다. 그대로 어두운 것들을 애써 하얗게 포장하는 것은 구역질을 부른다.

그의 작품은 새로운 미술 경향에 대한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지난날 리얼리티 미술은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현실을 비판하면서 운동으로서의 역할을 견지했다. 하지만 요즘 작가들은 사회에 대해 개인적인 시선으로 탐구하고 비판한다. 많은 변화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화풍과 경향의 변화가 감지된다.

현대인들은 자연과 신앙에의 귀의, 심원한 철학이나 사상에 대한 추종이 삶에서 중요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긴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인할 수 없지만 이것들은 모두 인간인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실천이 밑에 깔려 있느냐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서 선택된 그림들이 모두 최고인 것처럼 포장되고 인정을 받는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 대중의 평가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미술은 유독 일부 사람들에 의해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칼질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는 싸워야 한다. 자신의 언어와 색과 텍스트로 세상에 나서야 한다. 그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바로 예술가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 길을 그만두는 것이 좋다. 차라리 풍요로운 삶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올바르다.

 

 

이희명, 인공인간, 130x162cm, 캔버스 위에 과슈, 아크릴,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