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날이 밝아왔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바람이 잠잠해졌다. 이른 아침 잠시 산책에 나섰다. 물폭탄과 우레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어젯밤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길을 재촉했다.
네온사인과 자동차가 우글거리는 도심을 한 걸음 한 걸음, 큰 걸음으로 지나쳤다. 자연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사람처럼, 아니 어머니의 품으로 가는 아들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길게 뻗은 인도를 따라 걷다 연꽃이 무성하게 자란 조계사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꽃잎이 비에 두들겨 맞아 너덜너덜했다. 나는 마음이 아렸지만 곧바로 불편한 마음을 버렸다. 연꽃은 모진 고초마저 끌어안고 또다시 아름다운 꽃송이를 살포시 내밀고 있었다.
빗물과 습기가 엉겨 붙어 있는 앙상한 꽃잎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일주일 내내 무지막지한 빗물에 몸서리쳤을 연꽃처럼 인간도 삶에서 어느 순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나는 망가진 연꽃을 보면서 평화로운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슬슬 걸었다. 비에 젖어 폭신한 흙을 밟는 기분은 끝내줬다. 어떤 중압감이나 엄숙함, 괴로움이나 곡절 없는 깊은 평화를 느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가슴속에 박혀 있던 세속의 짐도, 자존심이나 명예심도 모두 던져버리고 그 품에 온전히 안겼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냥 몸을 맡기면 됐다.
잠시 일상을 떠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판에 박힌 일상을 사는 사람보다 활기가 있다. 돈이 없어서 못 떠나는가?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는 곳은 지천에 널려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나눠야 할 것도 주위를 돌아보면 아주 많다.
바람이 바뀔 때마다 휘어진 연꽃 줄기들이 제 몸을 여유롭게 흔들었다. 연꽃에 대롱대롱 매달여 있거나 잎사귀에 고여 있던 빗물들이 우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영롱한 소리를 냈다.
시선을 돌려보니, 작은 연못에 수련이 피어 있었다. 수련은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곱상한 자태로 찬란하게 빛났다. 아뿔싸.
삼 일 뒤 다시 조계사를 찾았다. 세차게 불어오던 바람과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던 빗물이 무색하게도 꽃봉오리들이 탐스럽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힘이 센 놈과 맷집이 센 놈이 싸우면 힘이 센 놈이 늘 이길 것 같지만 아니다. 힘이 센 놈은 때리다 지쳐 푹푹 쓰러져도 맷집이 센 놈은 모질게 버티면서 잔 주먹을 날려 힘이 센 놈을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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