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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저들에게 우리는, 이송희 시인『대명사들』

이동권 2024. 6. 4. 15:20

대명사들

 

이송희 시인의 사설시조집 『대명사들』이 출간됐다. 2020년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가 나온지 4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이다.

『대명사들』은 12년 전 『아포리아의 숲』으로 이송희 시인과 인터뷰했을 때 가졌던 시상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시인은 강렬하지만 거부감 없는 언어로 정치사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증언하고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고통을 안아 태운다.

[인터뷰] 아포리아의 숲, 이송희 시인 읽어보기

이송희 시인은 『대명사들』에서 그들과 저들(권력을 가진 자)에게 대명사를 불리는 ‘우리’를 단단한 시어로 새긴다.

개돼지로 불리면서 때 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 떠도는 유언비어 속 현행범이 되었다가 천하디천한 우리는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고...... / 이름을 잃은 우리는 대명사로 불린다
<대명사들> 중에서

『대명사들』에서는 어둡고 차가운 그늘 아래에서, 이욕에 눈이 먼 빌딩숲 뒷골목에서, 아주 사적인 공간에서 남 모르게 고뇌와 울분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보인다.

당신의 어금니에 납작하게 씹히던 몸 / 단물 쓴물 다 빼먹고 버려진 이 바닥에 질기디 질긴 연이 시커멓게 들어붙네 오래오래 씹었건만 너는 나를 모른다 하네......주렁주렁 열린 입들이 눈칫밥을 먹고 있네
<껌> 중에서

『대명사들』은 위선과 허위의 공간에서 미아처럼 헤매는 사람들을 들춰낸다. 와락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속이 매스꺼워진다.

강남의 도심 속에 눈먼 자들이 살고 있지 / 관습적인 악수와 함께 명함을 내밀면서 보이지 않는 손들은 나의 눈을 가렸지 귀와 입을 틀어막고 여린 목을 졸랐지 옆집 세든 여자가 주검으로 발견되던 날
<눈 먼 자들의 도시> 중에서

『대명사들』에서는 핏빛 광주 한복판에서 아직도 오월은 계속되고 있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정신이 번쩍 든다.

총구는 방향을 바꿔 우리를 덮쳤지 / 순신간에 날아간 눈과 일을 찾느라 얼굴은 바닥을 짚고 같은 곳을 맴돌았지 다급한 군화 발소리... 불 꺼진 초를 안고 다시 모인 저녁 광장 / 불타는 오월의 꿈이 불티 되어 떠돌았지
<여전히, 오월> 중에서

『대명사들』은 폐부를 꿰뚫고 골속을 헤집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시 속에 담긴 얘기가 궁금해진다. 자세한 해설은 『대명사들』에 실린 김학중 시인의 ‘시적 언어의 우정, 그 미약한 촛불에 대하여’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