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모퉁이에 서서 비를 본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둡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우중충하고, 나뭇잎도 가는 빗방울에 힘없이 흔들린다. 모두 외롭고 어두워 보인다. 비마저도 고독하게 한 방울씩 추적추적 떨어진다. 하지만 비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하나로 뭉쳐 대지에 스며든다. 근원적 외로움에 시달리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치유의 ‘테라피’가 무엇인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세상엔 홀로 있지 않는 것이 없다. 맘을 나누는 친구도, 몸 아파 낳은 자식도 인간으로서 혼자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 사랑을 대입시키면 얘기는 달라진다. 서로를 관계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인식하면서 ‘홀로’가 아니라 ‘함께’가 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밀이다. 비는 이러한 지혜를 몸소 보여준다.
행복의 비밀을 얘기하면 생각나는 책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다. 이 책은 정신, 금욕, 이성을 상징하는 나르치스와 감성, 자유, 정욕을 상징하는 골드문트라는 두 인물로 삶을 얘기한다. 지성과 지혜를 추구하는 나르치스, 에로스와 예술을 추구하는 골드문트가 한 수도원에서 만나고 헤어졌다 재회하는 과정을 그리며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파헤친다.
헤르만 헤세는 한 인간에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모두 공존하며, 이것을 얼마만큼 조화롭게 다스리며 살아가느냐가 행복의 열쇠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지렛대 어디에 받침대를 놓아야 평평한 수평을 이룰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 대한 관찰과 성찰과 이해와 용서로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에서는 익숙한 모티브가 발견된다. 더럽고 천박하지만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고귀한 영혼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며, 이들은 삶은 오직 사랑과 헌신을 통해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너무도 치열하고 고상한 인물들 때문에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어려워하는 독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혹독한 시련과 방황, 쾌락과 방랑이 주는 선물은 진실한 삶의 태도와 지혜로의 변용이 가능한 얘기다.
그의 소설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한 폭의 그림처럼 정신과 육체를 형형색색의 유연한 빛깔과 형상으로 채워준다. 피로를 느끼게 하거나 싫증을 유발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작고 옹졸한 마음속에 격려와 위안, 활력과 평화를 선사한다. 일종의 자정작용이다.
살며 사랑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다
굳이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무척 애를 쓰는 것처럼 돼버렸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구입해 읽는 순간부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골드문트처럼 수많은 방황과 경험을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는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또 수많은 생각의 거미줄을 사방으로 치면서 사는 습관도 얻게 됐다.
처음 이 책을 들고 찾아간 곳은 산이었다.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불그스름하고 흐릿했던 태양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거무스름한 밤이 됐다. 절벽 끝에 올라가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풍요롭게 늘어진 붉은 나뭇가지 위로 초록빛 유성이 작은 호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나는 서늘해진 마음을 데우기 위해 커피 한 잔을 타들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는 영혼의 빗장을 열고 기억 저편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기억해내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기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를 알게 된 것은 죽음을 사색하면서부터다. 머리맡에 엎드려, 빛바랜 낙엽처럼 윤기를 잃어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사람의 탄생은 슬픔의 시작이며 인생은 근본적인 환상과 덧없음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산 생명들의 숙명이기에, 하루하루 소진되는 시간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일지, 내일일지 확신할 수 없는 사나움은 참담함을 넘어 지독한 공포를 젊음에 각인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의 부패와 소유의 상실에 대한 환멸이 아니었다.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진실의 실체였고, 일상을 대하는 태도와 정신의 성찰이자 충고였다. 또 삶의 실제적 의미와 죽음을 대비하는 참다운 방법 즉, 지혜로운 삶과 죽음에 대한 중대한 고민에 직면토록 했다.
우선 나는 그저 그렇고 그랬던 과거와 사유의 찌꺼기들을 정리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겠지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궁극적인 위안을 얻는 과정의 시작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을 찾아 떠난 첫 여행은 끔찍했다. 그 절망의 실체는 내가 젊다는 것이었다. 그 젊음의 초상은 아직까지 기자가 진정한 삶의 과정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했다. 그저 방종한 기운으로 청춘의 향기를 발산하고 구미에 맞는 음식과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 가는 인간으로 여기게 했다.
한동안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소름 끼치는 젊음의 도취를 지우기 위해 혹독한 병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젊음을 돌이켜보면서 용서를 빌고 산뜻한 처분을 감내하며 마음의 현상을 다스려야 했다. 또 훼손되지 않는 진리의 빛과 소리로 새 살을 채우는 여정을 가져야 했다. 그래야만 떨려오는 몸을 안정시키고 썩어가는 영혼을 구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산으로, 또 산으로 떠났다.
생각의 끝은 언제나 순수한 열정을 잃고 어둠을 헤맸다. 주위에는 스스로 불행한 시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 웃음 짓던 위선이 맴돌았다. 또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사리를 판단하는 감정은 끝없이 무뎌졌고 어리석은 충동과 노여움으로 낯빛은 어두워져 갔다. 달콤함도, 애틋함도, 그렇다고 경건하고 고상한 것도 아닌, 폐허였다. 낭비였고 헛구역질 나는 쓰레기와 오수의 향연이었다. 그 모습은 딱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나오는 책의 한 장면 같았고, 골드문트의 삶은 자연스럽게 나와 교차될 수밖에 없었다.
골드문트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외로운 아이였다. 아버지는 골드문트를 순결하고 고고하게 키우기 위해 마리아 브론 수도원으로 보냈다. 수도원에는 젊은 교사 나르치스가 있었다. 그는 지성과 품위를 겸비한 사색가였고, 자기 직분을 천직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 달리 에로스적이고 자유분방한 몽상가였다. 그래서 골드문트는 고귀한 나르치스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나르치스는 예민한 감성과 예술적 소질을 가진 골드문트를 아꼈다. 그래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성직자의 길을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더욱 가르치려고 했다. 하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성품이 정신적인 삶과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본성에 눈을 떠 자신의 길을 걷도록 알려줬다. 인간에게는 각자 주어진 길이 있으며,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얘기를 듣고 각성한 뒤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다. 규율과 질서가 있는 곳에서 자유와 무질서로 넘치는 속세를 향해 방랑길을 떠났다. 그 길은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욕망과 죄악으로 가득한 세속의 길로 들어가면서 방황하고 타락하기 시작했다. 반면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떠날 때 하느님에게 말씀에 봉사하는 길을 선택하고 거룩한 소명을 준비하기 위해 단식과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완전한 대립이었다.
골드문트의 방랑길 앞에서 나는 잠시 깊은 사색에 빠졌었다. 서재에 앉아 무기력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고달픈 일상을 세상 탓으로 돌렸던 순간이 떠올라서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는 사는 것이 지옥이었다. 종일토록 몸을 웅크린 채 창백한 웃음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슬픔을 잉태했고, 더러운 욕정의 찌꺼기를 배설했다. 또 불꽃같은 욕망이 몸부림칠 때면 너무도 공허해 뿌연 빛으로 스며든 먼지투성이 속을 나뒹굴었다. 방랑길에서 들어선 골드문트는 나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다시 말을 타고 수도원을 떠나는 골드문트를 따라나섰다.
역시 골드문트는 그랬다. 골드문트는 참혹한 속세의 질서 앞에서 무너졌고 지독한 번뇌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경험의 정도는 나와 비할 수 없이 강도가 셌다. 골드문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면서 삶의 무상함을 알게 됐고, 속박 없고 무절제한 생활을 위해 고독의 고통을 느껴야 했으며, 행복을 즐기기 위해 웃음을 팔거나 공포를 감내했다. 또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먼저 죽여야 했고, 밤낮 없는 추위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숲과 맹수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했다. 그리고 병마와도 싸워야 했다.
골드문트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드넓은 석양녘의 형벌을 기억하며 종일토록 배회하고 쏘다녔다. 욕정의 소리는 허공에서 흩어졌고 거칠어진 눈빛은 어둠에 젖어들었으며 병든 육체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사랑으로부터 얻은 삶의 기쁨마저 깊은 잠에 빠지듯 서서히 사라졌다.
골드문트는 혹독한 고통과 성찰, 참회와 용서의 여정을 겪으면서 서서히 예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마리아상을 보면서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마리아상을 제작한 니콜라우스에게 조각가 수업을 받았다. 골드문트가 조각을 배우면서 만들려고 한 작품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벗 나르치스였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삶도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그는 다시 아름다운 풀꽃이 돼 방랑을 시작했다.
골드문트처럼 나도 젊은 시절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았다. 먹고사는 일은 열심히 하면 할수록 공허함만 줄 뿐이었다. 나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쓸쓸함이 어리면 무한히 뻗어 있는 길을 따라 예고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 파도를 물어다 주는 바닷가, 신묘한 구름이 서린 산꼭대기.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곳까지 걸었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방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적막한 밤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아파 왔다.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사념은 떠나질 않았고 절망적인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육체의 고행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방랑은 답을 주지 않았다.
가끔씩은 이정표 없이 반짝이는 별을 쫓았다. 변함없이 밤하늘에 떠서 슬픔에 넘친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고, 허무 속으로 꺼져 가는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평화와 고요의 시간을 기대하면서 꿈과 추억 속에 메몰 된 영상들을 살며시 열어 보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처럼 몽환적인 기분만 선사했고, 인간의 숙명을 상징해내는 묘비와 같이 강렬한 색채로 각색될 뿐이었다. 괴로움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기억상실증을 유도하는 차가운 절규로 되돌아왔다. 죽음의 유혹이 느껴졌고, 사랑스러웠던 감정마저도 떠나버린 무미건조한 열정을 솟아나게 했다.
하늘이 잿빛으로 번지며 붉은 띠를 만든 어느 날이었다. 시야가 탁 트인 언덕에 올라서서 바람의 자취를 들으며 한 그루 늙은 산매자나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작은 나루터에서 홀로 객을 기다리는 늙은 사공의 느긋함을 따라 마음을 편히 놓아버렸다. 그때 멀리서 위대한 성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 보이는가? 핏발 서린 대지를 쓰다듬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엇이 되더라도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것을 거역하거나 이겨낼 수 없다. 모든 욕망을 놓아버리고 삶을 해체하라.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다.”
정열은 쉬 지나가 버리고 우정은 드물며 믿는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나는 가슴을 후벼 파는 절절한 음성을 들으며 삶과 사랑의 의미를 생각했다. 또 고통은 외적인 현상에만 치중해서 본질을 보지 못한 쓸데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됐다. 그 겉모습은 의미와 가치를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허영의 산물이었다. 나는 방랑길이 아니라 어차피 죽어야 할 숙명을 지닌 여정 위에 서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뒤부터 타오르는 방랑과 자연의 부름으로부터 끓어오르는 탐닉과 욕망의 불꽃을 다스리면서 젊음의 초상과 과거의 속박과 미래의 절망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골드문트는 예술가의 삶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와 사랑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페스트가 창궐한 마을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큰 충격을 받았고, 삶의 의미와 예술의 본질을 깨달았다. 만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인류의 어머니 이브에 대한 상도 품었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총독의 애인과 정사를 가진 것이 발각돼 처형의 위기에 직면했다.
우연히 골드문트를 만난 나르치스는 그를 구해 수도원에 데리고 왔다. 이때부터 골드문트는 안식을 찾고 예술의 꽃을 피웠다. 나르치스는 인생의 온갖 고통과 투쟁과 희생을 경험한 뒤 작업에 몰두하는 골드문트를 보면서 위대한 인간상을 발견했다. 정신과 사색과 통찰과 지혜로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골드문트에게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행복이었다. 하지만 골드문트의 몸은 이미 망가질 때로 망가져 있었다.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눌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품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았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무척 신중해졌다. 사사로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서 삶에 대한 한층 두터운 애정과 인내심도 갖게 됐다. 그것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을 두렵지 않게 해주는 작은 손전등 같은 빛이었다. 아울러 무수한 고독의 나날이 준 선물은 소박한 꿈과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힘이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완벽하거나 위대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가식을 벗어던지고 자연으로 떠났고, 사람들과 만나 술잔을 나눴다. 적막한 밤이 되면 시골 농가의 초원에 앉아 작은 행복을 노래했다.
사는 동안 맞서게 되는 현실에는 바짝 긴장했다. 죽음과 신비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아름답고 추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원했다. 어디에도 구속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안고 스스로 죄를 꾸짖으며 지혜와 온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할 일을 해나가는 씩씩한 사람이 되길 갈망했다. 이것은 내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난 뒤 세상에 고하는 첫 다짐이었고 지난날의 혹독한 성찰의 결과물이었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젊은 날의 방황이었다.
지독한 방랑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치유의 손길이 스며들었다. 끝없는 생성과 정화의 노래가 들려왔고 내면으로 파고드는 알 수 없는 힘도 느껴졌다. 그것은 뜨거운 포옹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진홍빛 축복이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추한 것과 마주하면서 영혼의 순수함은 넓은 수평선 너머, 갈매기만이 갈 수 있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창창한 열정의 향기도 사라졌다. 대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답게 녹아들며 찰나의 영묘함을 연출하지만 나는 외모도 변하고, 용기도 없어지고, 지성도 퇴화되고, 열정도 위축됐다.
이제는 그저 텅 비고 비워진 마음으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친구들의 삶과 고통, 오랫동안 추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은 성실함을 토닥거리고, 타인의 삶을 인정하려는 너그러움만이 남아있다. 또 순수함으로 방황할 수 있었던 마음이 사랑과 같이 진중하고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순수한 마음 없이는 진정한 사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삶에 감사하고 있다. 특히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삶을 알려준 헤르만 헤세에게.
인간에게는 모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존재한다. 어느 한쪽으로만 위치할 수 없어 흔들리고 고뇌하고 고통에 빠지는 게 인간이다. 우리가 영혼의 평강과 행복을 구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정신과 육체를 조화시키고 평정심을 갖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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