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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 무기력과 이성의 상실에 대응하는 자세

이동권 2022. 10. 10. 21:50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 책 표지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어렵다. 상대방의 기질과 걱정거리를 잘 알아야 하고, 취향의 문제도 걸린다. ‘내가 읽어보니 좋았다’고 무작정 추천했다가는 상대방의 기대에 어긋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두루 정서가 통용되는 책은 왠지 추천이 꺼려진다. 가볍고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으나 가슴에 꽂히는 한방이 없다. 그럴 때는 고전을 추천하고, 읽어보길 권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황야의 이리>는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다. 헤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이 소설로 치유한다. 먹고사는 문제, 보통이 아니다. 사람의 욕망 또한 거대하다. 소유와 쾌락의 욕구를 끊어내기 위한 몸부림에 내내 지쳐가며 사는 것이 삶이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절차탁마의 자세로 학문과 덕행을 닦는 몸부림도 존재한다. 자신이 정한 전락의 선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양심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참고 공부하는 고통이다. 

헤세는 힘겹고 혹독한 시련을 겪는 사람들, 반면 떠들썩하고 요란스럽게 들떠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세상을 보는 혜안’을 전한다. 이 책은 헤세가 자신을 성찰하며 쓴 고백서이자, 소설 형식을 빌은 일종의 고해성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황야의 이리>는 헤세의 다른 소설과 다르다. 대부분 소설이 기독교와 인간의 정신세계에 천착했다면 이 작품은 구시대의 체제와 관습에 저항한다. 그래서 이 책은 수많은 청년들의 삶을 인도하는 지침서가 됐다. 소설의 기법 또한 다른 작품과 판이하다. 한 편의 소설이 다양한 시점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을 어렵고 모호하다고 평가하는데,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세계1차대전 당시 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써 독일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헤세는 꿈쩍하지 않고 전쟁반대를 외쳤다. 오히려 헤세가 더욱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반전을 외치지 않은 시민사회의 속물성과 비겁함, 이기심, 안전제일주의였다. 그들의 무력감과 이성의 상실은 헤세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겨줬다. 그래서 헤세는 언론과 국민의 눈으로 보면 이방인과 같은 주인공 하리 할리를 등장시켜 <황야의 이리>를 썼다. 소설 안에서 보수적이고 선동적인 신문으로부터 주인공이 모질게 공격받는 장면, 한 교수가 전쟁 반대의 글을 쓴 주인공을 거론하면서 신랄하게 비난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주인공은 그런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노력했다. 그 인내의 뒤에는 엄청난 용기와 의지가 있었으며, 헤세는 그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감쌌다.  

이 책은 애초에 삶이 고민 덩어리인 사람이 읽으면 좋다. 유독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이 잘 살고 있는지, 조그만 흠집에도 안달을 내는 사람들에게 상서로운 양서다. 이 책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헤세의 본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이 책을 좋아하긴 힘들다. 언제나 소박하고 긍정적이며 가볍고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골칫덩어리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은 하리 할리다. 쉰이 가까운 나이. 우리나라로 치면 중년 남자다. 하리는 자신이 정해놓은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에 선을 그어놓고 절대로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는 모차르트나 클래식 이외의 음악은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음악은 그저 소리에 불과하다. 

하리는 자신에게 경제적 이익과 즐거움을 주는 일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추악함과 나약함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억누르며 고독까지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인다. 그는 괴테의 철학과 사상, 이상을 스승으로 삼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정한다. 하지만 그에게 극심한 좌절과 번뇌가 찾아온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비난, 주관과 정체성에서 벗어난 일련의 일들을 끊어내기 위한 고통이 만만치 않다. 인내만을 강요한 삶이 주는 압박, 이상과 실제의 삶이 다른 괴테, 그리고 괴테에 대한 의심은 옳고 그름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에 혼란을 준다. 하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삶의 고통 때문이다. 즉 죽음은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여긴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믿고 따랐던 하나의 상이 사라지면서 자신의 삶이 고통과 실패로 끝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춘다. 더 이상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따르려 하지 않는다. 예전과 같은 삶도, 그렇다고 일반인들과 같은 삶도 모두 버린다. 오직 그는 무엇이 어떤 가치가 있느냐만 판단하고 가늠할 뿐이다.

하리는 여인 헤르미네를 만나면서 변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리를 추동하도록 돕고, 하리는 하면 안 된다고 여겨지던 것들을 기꺼이 그녀의 명령에 따라 행한다. 이를 테면 한 번도 춰 본 적 없는 춤을 추는 식이다. 하지만 하리는 술집에서 일하는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끄덕이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면서 자신 안에 숨겨진 모습을 발견하고 직시한다. 천박하고 하찮게 생각했던 짐승의 영혼이 자신 안에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달라진다. 그는 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선을 긋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 안의 이리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마주 선다. 그리고 모든 혼란을 이겨낸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다. 한쪽에서 보면 인간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이성과 지성이 마비된 짐승이 있다. 사람은 짐승의 탈은 숨긴 채 인간의 얼굴로 산다. 그 탈이 ‘얼마나 잘 탄로 나지 않느냐’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사는 동안 ‘거짓과 타락의 유혹에 빠지는 횟수가 얼마나 적느냐’로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자신 안의 짐승이 있는지 모른다. 인정하지도 않는다. ‘먹고사는 일이 다 그렇지 않으냐’고 핑계를 대고, 자신에 대한 아주 작은 성찰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고통과 번민에 빠진다. 짐승의 얼굴을 가리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헤세는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의 조각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가장 참다운 선에 가깝다고 얘기한다. 그래야만 웃음과 유머를 무기로 사람들을 대하고,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으며, 결말을 모르는 두려움에서 도망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길로만 가려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모든 결과를 예측하려고 한다. 좋은 결과를 위해서만 현실을 살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좌절한다. 하지만 삶은 어려움과 불확실성의 연속이고, 수많은 악수를 두게 되며, 여러 가지 도전을 받고 좌초한다. 그럼에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미래를 향해,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 전진하는 것이 인생이다. 실험과 파격, 비이성과 비도덕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인생이라 할 수 있다. 

<황야의 이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고민을 없애는 방법을 얘기한다. 고민은 자신의 마음이 조각나서 생긴 일이니, 그 조각을 붙이면 해결된다. 조각을 붙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부터 마음이 조각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떠한가. 그것을 인정하면 삶의 고민은 줄어들지 않을까. 

이 책의 주인공 할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생하는 문제와 딜레마를 홀로, 고독으로 체화했지만 그것은 더욱 자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맞서고 싸우면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행여 이리의 얼굴이라고 해도 말이다. 헤르만 헤세는 이 책에서 그것을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라고 얘기했다. 헤세가 독일의 언론과 국민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반전을 외쳤던 이유도 다르지 않다.